전원생활

[스크랩] 시골로 간 사람들

지리산자연인 2009. 2. 22. 01:51
제목 없음
  • 11.가족끼리 황토집을 짓고 - 햇꿈둥지, 마당에 정자 만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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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직접 지은 황토집 앞에서 이철순씨 부부(좌측).
  • 일요일 오후 지나는 길에 불쑥 들린 햇꿈둥지에는 주인장이 없었습니다.
    황토집에는 어울리지 않는 얼굴 하얀 막내딸이 문앞까지 나와 뒷산을 가르킵니다.
    "부모님들은 지금 물 때문에 저기 산으로 가셨는데요."
  • 물 때문에 산에 가다니...
    아 그랬었지.
  • 산꼭대기에 있는 샘물에 호수를 대고 집 앞까지 끌어다 쓴다고 그랬었지...
  • 그래서 어느 쪽인지 알려주면 한번 가보겠다며 신발끈을 조이자 얼굴 하얀 막내딸은 손을 내저으며 말립니다.
  • "안돼요. 너무 멀고 찾을 수도 없어요. 저도 한번 갔다가 못 찾고 돌아왔는데요."
  • 만류에 하는 수 없이 산에 오르는 것은 포기하고 사진 몇 장만 철꺽철꺽 찍고 돌아서야 했습니다.
    사진을 찍으면서 보니 여름에 보았던 집과 달라진 것이 있었습니다.
    집 앞에 덩그렇게 정자가 하나 새로 만들어져 있고 정자 위에는 손질하다만 채소들이 흩어져 있었습니다.
    참 부지런도 하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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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근 마당에 정자를 하나 만들었다.
  • 중앙고속도로 신림 나들목 주변으로 전원생활을 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많이 몰리고 있습니다.
    지리적으로 이곳은 원주 치악산을 끼고 있어 경관이 수려하고 또한 중앙고속도로와 곧바로 연계가 가능해 서울까지 2시간 정도 밖에 걸리지 않습니다.
    특히 중앙고속도로를 이용한 제천, 대전 등 충청도 지역과 연계가 쉽고 국도를 이용하면 영월을 거쳐 정선 카지노, 동해안으로 갈 수도 있는 곳입니다.
  • 이철순씨가 사는 집 햇꿈둥지는 치악산 끝자락인 소토골 언덕배기에 있습니다.
    신림나들목을 나와 우회전을 하면 곧바로 신림면 소재지가 되고 이곳 삼거리에서 우회전을 하면 원주로 가는 방향이 됩니다.
    원주 쪽으로 가다 우측으로 두 번째 굴다리를 지나 만나는 마을이 소토골인데 이곳에 터를 잡은 것은 96년도입니다.
    빈농가에서 몇 년 살다 2000년 9월 가족끼리 황토집을 짓기 시작해 40평 정도의 황토집을 최근 완성해 냈습니다. 시골생활을 시작한 것부터가 가장 자연에 가까운 삶은 살고 싶었기 때문인데 그래서 집도 황토로 하였고 물도 산에서 길러다 먹고 그리고 사는 것도 자연 그대로입니다.
    또한 사람들을 좋아해 주말이나 휴일이면 햇꿈둥지로 친구, 친지들이 모여들고 있습니다.
  • 올 여름까지 거의 집 짓는 일은 마무리 되었고 최근 마당에 정자도 하나까지 만들어 집 짓는 일은 일단 성공을 하였습니다.
    이제 슬슬 집 주변 정리를 하여야 하고 뒷산에 단풍이 드는 것을 보니 햇꿈둥지도 겨울나기 준비를 해야 할 때가 된듯합니다.
  • 이철순씨는 소방공무원입니다.
    이곳서 이천소방서까지 매일 출퇴근을 합니다.
    이들 가족과 집 짓는 이야기를 모두 하려면 몇 밤을 꼬박 새워야 할 것 같아 이만 줄입니다.
  • 햇꿈둥지의 집짓는 이야기, 사는 이야기는 '전원을 꿈꾸는 사람들' 메뉴에서 이미 여덟번이나 연재를 하였습니다.
    햇꿈둥지의 모습과 그곳 사람들의 사는 모습을 보시려면 '전원을 꿈꾸는 사람들'로 가셔서 직접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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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2. 전기도 없는 집, 손수 가꾸며 사는 교사 부부 - 단풍은 봄꽃마냥 화사하게 흩날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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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치악산국립공원 안에 있는 이 집 마당에는 단풍이 지고 있었습니다.
    지는 단풍이지만 봄꽃같이 화사하기만 했습니다.
    너무 아름다운 집이었습니다.
  • 서울서 교사생활을 하던 홍문자씨 부부는 벌써 8년 전에 이곳에 터를 잡고 여태껏 살고 있습니다.
    남편은 현재 원주에 있는 여학교의 영어선생님으로 이곳서 출퇴근을 하고 부인은 이곳에 들어오면서 초등학교선생님을 그만두었습니다.
  • 막내를 대학에 보내던 해였으니 햇수로 벌써 8년이 되었습니다.
    좀 더 나이들면 힘이 들어 이런 곳에서 살지 못할 것같고 또 집 가꾸는 재미도 못 느끼고 살 것 같아 더 늙기 전에 시골생활을 하겠다는 생각으로 서둘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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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처음 올 때는 마을에서도 한참 떨어져 있는 동네라 비포장 길을 약 1㎞ 정도 들어와야 했고 집이라고 이들이 사는 집밖에 아무도 없었습니다.
    당연히 전기도 전화도 없었습니다.
    전기는 발전기를 쓰기도 하고 호롱불을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전기가 들어온 것이 올 추석 직전이었으니 이제 한달 겨우 되었습니다.
  • 화전민들이 살던 흙집을 개조해 여태껏 살고 있습니다.
    올해는 찾아오는 손님들을 위해 최근에는 15평 정도의 귀틀집도 하나 지었습니다.
    집 앞에는 계곡을 건너는 구름다리도 하나 놓았습니다.
    다리 위에서는 하도 흔들려 구름을 탄 듯한 기분입니다.
  • 근래들어 주변에 집들도 몇 채 들어 왔습니다.
    대부분 서울사람들의 별장입니다
    내년부터는 민박도 해볼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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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원주 신림에서 치악산 쪽으로 들어가다 보면 매표소 직전에 계곡을 건너는 다리가 있고 이내 비포장이 이어집니다.
    겉보기엔 그냥 산길입니다.
    이 길을 따라 거의 1㎞ 정도 들어가면 산간마을이 하나 나옵니다.
    단풍이 봄꽃같이 흩날려 꽃잎이 되는 마을입니다.
    계곡은 단풍들로 모자이크가 되고 있습니다.
  • 이 집에서 또 하나 아름다운 것은 계곡입니다.
    단풍잎이 발 디딜 틈 없이 덮여 있는 계곡엔 폭포가 하나 있습니다.
    사철 물이 끊이지 않는 앙증맞은 폭포입니다.
  • 그곳에 주인 부부가 자연을 그대로 두고 손수 가꾸어 가는 아름다운 집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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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3.동강 어라연 가는 길목에 집을 짓고 - 일년 살며 래프팅 객들에게 펜션으로 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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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월읍내에서 동강변의 가장 오지마을 어라연으로 가기 위해서는 동강변을 따라가게 됩니다.
    뱀처럼 구불구불한 강변에서 만나는 마을은 새로 생긴 카페, 민박 등이 쉽게 눈에 띄고 특히 래프팅이란 간판은 그야말로 발 디딜 틈 없이 다닥다닥 붙어 있습니다.
    동강의 마을들을 지나 어라연으로 가다 2차선 도로가 끝나고 일방통행만 가능한 길이 나오면서 이내 고개가 됩니다.
    어라연을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넘어가야 하는 길, 래프팅 선착장으로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넘어가야 하는 고개, 겨울이면 세찬 바람이 지나가는 고개 중턱에 오정주, 김사순 씨 부부가 집을 지은 것은 작년 말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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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강에 반해 이곳 마을을 다니다, 집을 짓기도 전에 건축주 오정주 씨는 컨테이너 하나를 갖다놓고 이곳에서 생활하며 농사를 짓기 시작했습니다.
  • 이곳으로 오기 전 오정주씨는 서울에서 오랫동안 사업을 하며 긴장의 연속 속에서 살았습니다.
    IMF를 맞아 한 차례 위기를 겪으면서 평생 같은 모습으로 살게 될까봐 겁이 났습니다.
    그래서 더 늦기 전, 예순을 바라보는 나이에 시골생활을 결심했습니다.
    애초에는 부지 200평에 30평 정도의 주택을 지을 생각이었으나 주변의 땅 3000여 평을 구입하여 농사를 짓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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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내년부터는 본격적으로 포도농사를 해볼 생각입니다.
    올 한 해 이곳에서 살며 여름철 래프팅을 위해 찾아오는 관광객들에게 집을 빌려주면서 적잖은 임대수익을 올렸습니다.
    애초 집을 지을 때 펜션이나 민박을 본격적으로 해 볼 생각은 아니었지만 사람들이 몰려들면서 자연스럽게 방을 임대하게 되면서 펜션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집 주변에 방갈로 형태의 집을 몇 개 더 갖다 놓고 전문적으로 펜션을 해볼 계획이며 펜션과 연계하여 직접 재배한 포도도 판매할 생각입니다.
    이런 이유로 포도농사를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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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집 뒤에서 바라본 모습. 집 앞을 지나 어라연 계곡으로 가는 고개로
    고개를 넘으면 어라연 가는 길과 래프팅 선착장이 있다.
  • 어라연과 래프팅 선착장으로 가는 길목이란 지역조건과 홍갈색 프레임으로 포인트를 준 언덕 위의 하얀집은 지나는 사람들의 눈길을 끌기에 충분하다.
    이런 이유로 지나는 관광객들이 심심찮게 들러 집을 빌려달라고 합니다.
    펜션을 생각하고 지은 집은 아니지만 자연스럽게 펜션의 조건을 갖추게 되었고 단순히 전원주택으로 이용하는 것보다 펜션으로 운영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아 펜션으로 변화를 시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집의 40평으로 단층 목구조 주택입니다.
    단층집의 단조로움을 식당과 거실 등 모서리를 원형으로 처리해 변화를 주었습니다.
    외벽은 흰색 시멘트 하디사이딩과 아스팔트싱글을, 거실과 주방 천장은 미송루바로 마감하여 자연스런 느낌을 강조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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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내부구조는 우측으로 방과 욕실 등을 치우치게 배치하고 볕이 잘 드는 쪽에는 거실과 주방을 만들었습니다.
    설계에서 신경을 쓴 부분은 거실과 식당인데 거실의 경우 앉은 높이에서 바깥 경치를 마음껏 감상할 수 있도록 창을 낮게, 여러 개를 만들었습니다.
    식당은 팔각형으로 하여 공간을 돌출시키고 식탁과 의자를 공간에 맞추어 앉혔다. 외관상으로도 돌출되어 있고 뾰족지붕으로 만들어 전체적인 주택의 외관에 큰 변화를 주었습니다.
  • ■ 꿈동산펜션 : 033-462-3947, 011-215-04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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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4.공작산 품서 심마니가 손수 가꾸는 황토펜션 - 흙집 굴뚝에서는 그림처럼 연기가 피어 오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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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홍천에서도 동면지역은 전원환경이 좋아 찾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서울에서 속초로 향하는 국도에서 갈라져 나와 동면으로 들어가는 길은 진입로가 좁고 커브가 심해 다소 위험한 것이 흠이지만 그 안쪽마을은 아늑하기만 합니다.

    특히 동면의 가장 안쪽, 서석으로 들기 직전의 마을인 노천리에 있는 공작산은 홍천에서 보기드문 명산으로 주변이 아름답습니다.
    산세가 공작의 날개를 펼친 모습과 같다하여 붙여진 이름 공작산은 해발 887m로 산 정상에서 바라보면 홍천군 일대가 한눈에 들어옵니다.
    기암절벽과 노송군락을 보기 위해 찾는 사람들이 많고 공작산 아래 쪽으로 수타사 및 수타계곡 등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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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면을 관통하여 가는 도로에서 공작산의 이정표를 보고 길을 바꾸어 들어가다, 포장길이 끝나는 곳에 다다르면 저수지가 있고, 저수지 위쪽으로 계곡을 건너 산 속으로 드는 비포장길이 나옵니다.
    계곡을 따라 나 있는 이 비포장 길은 공작산으로 오르는 등산로인데 이곳에서 약 1㎞ 정도 더 들어가면 굴뚝에서 연기가 오르는 황토집들을 볼 수 있습니다.
    공작산을 배경그림으로 하여 산자락을 따라 제 자리를 잡고 있는 황토집은 임꺽정의 산채 같기도 하고, 화전민의 자연부락 같기도 하여 집인지 산인지 나무인지 분간이 안될 정도로 너무나 자연스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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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올해 쉰인 최영락씨가 이곳에 들어온 지도 벌써 3년이 되어갑니다.
    맨 위에 집을 짓고 살면서 이곳 땅을 하나하나 손수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이곳에 마을을 만들기 위해 50,000여 평의 땅을 구입하기까지 걸린 시간도 강산이 바뀐다는 꼬박 10년입니다.
    처음 살 때의 땅 값과 맨 나중에 산 땅 값의 차이가 15배가 될 정도로 오랜 시간 이곳에 공을 들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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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하다 갑갑증이 생겨 서른 초반의 나이에 처자식 데리고 강원도로 내려왔습니다.
    고향이 청주지만 강원도를 택한 것은 산삼을 캐기 위해서였습니다.
    한 삼년 정도 심마니를 뒤를 쫓아 다녔지만 산삼은 한 뿌리도 못 캐고 고참 심마니들의 심부름만 열심히 하며 푼돈을 받아썼습니다.

    그렇게 고생을 하고 나니 어느 날부터인가 자신은 산삼을 제일 잘 캐는 심마니가 되어 있었고 돈도 많이 벌었습니다.
    돈이 생길 때마다 물 좋고 경치 좋은 곳에 땅을 하나 둘 사두었고, 이곳은 다리에 힘이 빠져 산을 타지 못할 때가 되면 직접 들어와 살겠다는 생각으로 특히 신경을 써 하나둘 사두었던 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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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년 전 이곳으로 들어와 공작산자연휴양림이란 이름으로 땅을 가꾸고 있습니다.
    이곳에는 현재 귀틀형 황토집이 네 채가 있는데 자연재(자연석, 흙, 통나무, 숯)를 사용하여 한 채를 짓는데 시공기간이 1~3년 걸릴 정도로 정성을 쏟았습니다.
    현재 펜션으로 운영을 하고 있는데 모든 집들이 황토방이며 100% 장작으로, 자신이 특별히 고안한 난방법으로 난방을 하고 있습니다.

    내부는 조리 시설과 도구는 물론 TV, 수세식 화장실, 노래방 기계, 숯불구이 시설, 야외 독립 가든을 갖추고 있습니다.
    집들은 각각 50평, 38평, 25평, 10평형으로 별장형이며 독채를 대여해 주는 식으로 운영하고 있습니다.
  • 요금은 50평형이 비수기, 평일 290,000이고 성수기, 휴일은 390,000원입니다.
    38평형은 350,000~250,000원, 25평형은 250,000~180,000원, 10평형은 120,000~90,000원입니다.
    앞으로 계속하여 산기슭을 따라 집을 지어나갈 계획을 갖고 있으며 70명 이상을 수용할 수 있는 통나무식당 겸 세미나실을 곧 오픈할 예정입니다.

    ■ 공작산자연휴양림 : 033-434-4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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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5.2년 동안 손수 지은 안면도 황토 흙집 - 바다로 가는 길목에 지은 소담한 흙집 한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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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흙집을 2년 동안이나 지었다기에 흙으로 대궐을 짓나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돈이 없어서 집 짓는 것이 오래 걸렸다고 말해버립니다.
    “돈이 없어 혼자 지었고 그러다 보니 오래 걸리데요? 허허허”
    격식 차리는 것도 싫고 가식도 싫어 훌훌 털어 내니 솔직한 속내만 남더라는 그이지만 2년 동안 공들인 정성과 애착은 마음에도 담을 수 없을 정도 입니다.
    2년간 각고하며 지어낸 그의 흙집 짓기 여정을 회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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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처음에는 쉬울 줄 알았습니다.
    지천에 널린 것이 흙이요, 쌓으면 집이 되는 줄 알았습니다.
    게다가 어릴 적에 흙집 살았던 기억이 그에게 용기를 부추겼습니다.

    “1년에 한번씩 추석 전후쯤으로 해서 집을 보수했던 기억이 생생했습니다.”

    그 때는 누구나 할 것 없이 그랬습니다.
    집단장도 새로 할 겸, 금이 가고 갈라진 벽에 재흙을 개어서 빗자루로 엷게 바르면 거짓말처럼 말짱 새집이 되곤 했습니다.
    그는 홀어머니도 건강히 모시고 하고 싶은 일도 하며 살기에 이것만한 것이 없겠다 싶어 당장 집짓기에 매달렸습니다.

    그런데 막상 시작해보니 시쳇말로 장난(?)이 아니었습니다.
    그때부터 골머리가 아파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렇다고 한 번 손댄 집을 접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어린 아이와 부인, 그리고 늙은 어머니와 함께 행복한 여생을 보내보겠다고 시작한 일을 이렇게 허무하게 관둘 수는 없었습니다.
    그때부터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흙집 짓는 노하우를 배우고자 전전긍긍했습니다.

    그러나 흙집을 성공적으로 지었다는 사람도, 흙집을 전문적으로 짓는다는 업체도 좀처럼 비법을 가르쳐주려 들질 않았습니다.
    야박한 인심이야 속상하지만 탓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는 직접 몸으로 부딪치며 6개월 간 흙집을 터득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고 드디어 집을 지었습니다.
    그러나 어김없이 실패는 찾아왔습니다.
    흙을 너무 모른 것이 원인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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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흙이라고 해서 다 같은 흙이 아니었습니다.
    흙끼리 서로 좋아 응집하여 단단해지는 흙, 서로 싫어 밀어내고 떨어지는 흙 등 다양하기 이를 데 없었습니다.
    그 중 가장 집짓기 좋은 흙이 황토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황토의 질도 천차만별이라 황토라고 무작정 쓰면 골탕 먹기 딱이었습니다.

    결국 흙집 짓는데 으뜸 황토는 노르스름한 색의 여주 황토, 우리가 흔히 황토라고 알고 있는 붉은색 적토, 그리고 매흙을 최고로 친다는 것을 알아냈습니다.

    “저는 마침 운이 좋았습니다. 집 가까운 동네에서 적토를 쉽게 구했습니다.”

    1.5톤 덤프트럭으로 다섯 차를 실어 나르며 집을 짓기 시작했는데 예상치 못한 결과들의 연속이었습니다.
    흙이 집의 무게를 견디지 못했고 기둥을 세우는 중심 공사는 흙으로 감당하는 것이 무리였습니다.
    게다가 흙은 타 자재와 접착이 쉽지 않은 재료라서 순수 흙집만을 상상했던 그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습니다.

    가장 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라고 만만하게 봤다가 된통 혼이 난 셈입니다. 결국 그는 기둥은 흙 대신 나무와 벽돌을 쌓는 조적공사를 혼용했습니다.
    아주 흙으로만 짓는 것은 무리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안심도 잠시, 또 새로운 문제가 그를 찾아왔습니다.
    바로 ‘낙숫물’입니다.
    비가 오면 처마에서 떨어져 흙벽으로 튀는 낙숫물 때문에 아랫부분이 허물어지기 시작했습니다.
    황토의 강력한 흡수력이 문제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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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흙집과 물이 상극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낙숫물이 튀어 오르는 1m까지는 흙 대신 돌을 쌓아 지반을 앉히고 허물어지는 것을 막았습니다.”

    또한 비를 막을 수 있는 재질을 흙에 섞어 외장을 마감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외장을 철저히 한다 해도 본래 흙이 지닌 수축·응집성까지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바로 흙집의 가장 난제로 남고 있는 ‘균열’이 복병이었습니다.

    균열은 겨울에 더 심했습니다.
    물이 얼었다 녹았다 하면서 안으로 밖으로 흙집은 사정 봐주지 않고 갈라졌습니다.
    할머니 이마의 주름 같은 굵은 금들이 그의 마음속에서도 쩍쩍 소리를 내며 갈라졌습니다.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봤지만 역시 정답은 단순한 곳에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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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괜히 꼼수를 쓰지 않고 옛 선인의 지혜를 조금만 빌려도 해결책은 가까이 있었습니다.
    바로 지푸라기와 소금이 그의 구세주였습니다.
    흙이 짚과 섞이면 균열을 막았고, 소금은 흙끼리 엉겨 붙는 힘을 강하게 했습니다.
    게다가 소금은 집의 부식과 벌레도 막아줘 자본금이 넉넉지 않았던 그에게 효자가 따로 없었습니다.

    이제 그는 흙집 박사가 다 됐습니다.
    흙과 함께 마사나 모래를 섞으면 수축이 덜하다는 것도 알았고, 넓은 하우스 비닐을 사다가 그 위에서 흙을 게면 몇 날 며칠이고 찰지고 부드럽게 황토를 저장할 수 있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이것은 모두 그가 2년간 흙집과 몸으로 싸워 이기며 얻은 살아있는 진리입니다.
    그러나 그는 아직도 그의 집이 미완성이라고 말합니다.

    “살다 보면 보수해야 할 부분도 생기고, 또 나 원하는 대로 고쳐갈 일도 많은데 이렇게 허술한 집을 두고 다 지었다고 말하는 것이 부끄럽습니다.”

    그의 황토집은 현재 살림집이자 전원카페 ‘시골풍경’으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흙집을 지어낸 이력도 그러하지만 그의 카페에 가면 유독 눈길을 끄는 이채로운 것이 있습니다.
    다름 아닌 ‘창문’입니다. 이는 건축 당시 자금이 달려 실제 버스 창문을 가져다 쓴 것인데 그것이 오히려 운치를 더합니다.

    이곳을 찾는 이들은 카페에서 내어 파는 작설차가 일품이며 차한잔 마시며 ‘버스 창문’으로 들어오는 시골의 정다운 풍경들을 보고 있노라면 마치 관동유람이라도 가는 듯한 기분이 절로 든다고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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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6.깊은 산속에서 부부가 함께 지어가는 황토산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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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늦은 점심시간, 차린 건 없지만 많이 들라며 내 놓은 점심상엔 향긋한 봄나물이 가득 차려져 있었습니다.
    한참이나 시장기가 들었던 참 이어서였는지 밥 한 그릇을 뚝딱 다 먹고 나서 또다시 한 그릇을 더 청했습니다.
    이번엔 공기에 내 오신 것이 아니라 커다란 대접에 밥을 하나 가득 담아서 내 놓습니다.
    길손이 맛나게 점심을 먹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안주인의 얼굴엔 마치 휴가 나온 아들을 대하는 듯한 따스함이 넘쳐흐르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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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평창 금당계곡을 건너 산 밑으로 난 작은 길을 따라 한참 산으로 올라간 곳, 하늘과 닿아있는 그 속에 임꺽정의 요새와 같이 생긴 올망졸망한 황토집이 있었습니다.
  • 산꼭대기라 그런지 하늘은 더욱 푸르고 봄볕은 따가왔습니다.
    사실 봄볕이 아니라면 길섶에 머리를 내밀고 피는 봄꽃들과 같이 걷는 길이 아니라면 걸어서 올라가기 힘들 정도의 가파른 길이었습니다.

    산막 입구에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웃고있는 장승들을 보면서 그 안쪽에 사람이 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그런 산중이었습니다.

    구룡골산막을 꾸려 나가는 김종식(55), 마영완(53) 부부가 이곳에 내려 온 것은 2000년 봄입니다. 일산에 살다 이곳에 처음 내려 왔을 때는 오지마을이라고 불러도 될 만큼 지금보다도 훨씬 더 오지였습니다.
    그리고 처음 2년간 시골생활에 적응하는 기간을 가졌습니다.

    2년이란 시간이 흐른 후 이젠 시골에 사는 것에 어느 정도 자신감을 붙인 후에 살림집 옆에 민박을 겸하는 흙집을 짓기로 결심을 하였습니다.
    시골에 두 부부가 살기에는 조금 적적하기도 하고 산림에도 보탬이 될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부부는 수소문 끝에 인근에서 흙집 교육을 시켜 주는 곳에 교육등록을 한 후 4개월간 열심히 수업을 받은 후 마침내 첫 삽을 들었습니다.
    하지만 교육을 받을 당시에는 집 짓는 것이 무척 간단해 보였지만 막상 하나에서부터 열까지 모든 과정을 손수하려다 보니 수많은 난관에 부딪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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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중에 부부싸움도 많이 하고 또 서로에게 힘을 내자고 위로의 말도 건네면서 거의 1여년 만에 흙과 나무로만 객실 4개를 갖춘 흙집을 완성해 내었습니다. 모든 것을 두 부부의 힘만으로 지었기에 건축비는 평당 100만원이 조금 안 들었습니다.

    다른 사람의 손을 빌리지 않고 직접 집을 지었다고 하니 많은 어려움이 있었을 것 같아 “가장 힘들었던 것이 무엇이었냐?”고 물었습니다.
    대답은 “바깥어른 키가 너무 작은 것이 가장 힘들었다”며 서로를 보며 함박웃음을 터트립니다.

    흙집을 다 만들어 놓고 두 부부는 얼마나 감격해 하고 행복해 했는지 그때의 감동은 지금도 잊지 못하고 있다고 합니다.
    민박동을 완성하고 이제는 손님 오시기만을 기다리면 되었는데 기다리는 손님은 좀처럼 찾아오지를 않았습니다.

    위치가 오지이기도 하지만 집 앞까지 들어오는 길이 험로인 관계로 4륜 자동차가 아니면 감히 들어오기가 힘든 까닭이었습니다.
    혹여 예약전화라도 받으면 남들 같으면 길이 험하다는 그런 내용은 손님들에게 알려 주지 않겠지만 순박한 두 부부는 꼭 길이 험해서 일반 승용차는 오기시가 힘들다는 말을 잊지 않았습니다.

    당연 손님이 많을 리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부부는 낙담하지 않았습니다. 시간을 가지고 하나하나 부족한 점을 고쳐 나가기로 했습니다.

    또다시 1여년의 시간을 보내면서 험로였던 진입로를 손수 다듬은 끝에 이젠 승용차도 집 앞까지 문제없이 들어 올 수 있게 하였습니다. 하지만 손님이 없기는 매 한가지였습니다.

    이번엔 계곡 주변으로 외국의 어느 별장 모습을 닮은 펜션들이 하나 둘 들어서더니 이제는 수십동의 펜션이 들어 왔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황토흙집 보다는 외관이 아름다운 펜션을 더욱 선호했습니다.

    이들 부부는 그래도 실망하지 않고 모든 것을 자신들의 부족함으로 돌렸습니다.
    어쩌다 찾아오는 가족손님들의 아이들을 위해 작은 시소도 만들어 놓고 무료한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옆방 손님들과 놀 수 있는 작은 족구장도 준비를 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가족들을 위한 황토흙집을 하나 더 만들고 있습니다.

    구룡골 산막에는 아직 봄이 찾아오지를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 봄을 준비하는 부부의 마음에는 봄 햇살이 가득 비추고 있었습니다.

    (황토 흙집에 대해서 경험해보고 싶은 독자분들은 구룡골 민박으로 문의를 해보세요. 흙집 만들어 가는 과정을 함께 체험할 수 있습니다.)
    ■ 구룡골 산막(033-332-08,
    http://sanmakmansa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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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7.시골 사람으로 융화돼 사는 재미 - 산에 살던 풀이라도 들로 가면 들풀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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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기도 안성에서 가장 아름다운 정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돈으로 산 정원이 아닙니다. 정성과 사랑으로 가꿔진 정원입니다.
    그의 정원을 거닐다 보면 풀 한포기, 나무 한 그루, 돌 한개 까지도 제각각 표정을 금세 느낄 수 있습니다.
    안성에서 가장 아름다운 정원을 가진 집과 주인을 만나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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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부고속도로 안성 인터체인지를 빠져나와 서운면쪽으로 내달리면 차 안으로 스며드는 공기가 틀리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향긋한 머루 냄새 같기도 하고 쉰내 나는 누룩 냄새 같기도 합니다. 언뜻 그 냄새의 정체를 알 수 없어 눈을 이리저리 바삐 돌려 냄새의 근원지를 찾아보기도 하지만 쉽게 찾을 수 없습니다.
    ‘어디서 많이 맡아본 냄새긴 한데 뭘까 …’

    서운면을 지나 신촌리 푯말이 보일 때 쯤 되면 연이어 펼쳐지는 밭을 보고 그 냄새의 근원이 뭔지 비로소 알게 됩니다. 포도 냄새입니다. 그것도 탱글탱글 송이송이 진 거봉포도 냄새입니다.

    안성은 거봉 포도의 본고장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안성에 들어서면 고샅마다 신내 같기도 하고 향긋한 냄새 같기도 한 것들이 진동합니다.
    김형극씨는 거봉포도가 나오는 안성 그것도 정중앙에 위치한 곳에 살고 있습니다. 거봉포도의 향에 취해 어질어질 달려야 다다를 수 있는 곳이 김형극씨의 집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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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파트에서 느끼던 시골풍경
  • 이제는 반농사꾼이 되어 집 앞뒤로 포도며 사과며 배며 살구며 안 심어 놓은 나무가 없지만 기실 김형극씨는 농사꾼 출신이 아닙니다. 태생은 천안이나 어린시절과 젊은 시절을 온통 서울에서 보냈기 때문입니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그의 행색에선 농사꾼의 티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찾을 수 없는 그런 모습이었습니다.

    그가 농사꾼이 되리라는 건 그의 일가친척 어느 누구도 알 수 없었습니다. 그저 남들보다 꽃과 나무와 돌을 좋아한다는 게 그에게서 찾을 수 있는 시골스러움의 전부였습니다. 땅에 무엇인가를 심으면 잎을 내고 줄기를 뻗어내어 과실을 맺는다는 게 젊은 김형극씨에겐 경이로운 일이었습니다.

    사실 그는 땅에 대한 관심이 남다를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습니다. 구청 지적과 공무원이 그의 직업이기 때문입니다. 그 일을 무려 30년 간 해 왔습니다. 구청 지적과는 사람으로 치면 호적을 담당하는 일입니다. 즉 땅의 호적을 담당하는 게 그의 직업인 것입니다.

    그의 고향은 천안입니다. 하지만 젊은 시절 내내 서울에서 생활했습니다.
    그에겐 마셔도 마셔도 해갈되지 않는 갈증이 있었습니다. 바로 자연에 대한 회귀 욕구입니다. 흙과 나무와 돌을 만지고 싶었습니다. 흙의 부드러움과 나무의 질감과 돌의 단단함을 눈으로 코로 귀로 느끼고 싶었습니다.

    결국 서울에 살던 김형극씨가 생각해 낸 건 본인의 아파트에 작은 시골을 만들어 내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말만 되면 들과 산을 돌아다니며 시골의 온갖 것들을 주워왔습니다.

    그리고 그것들로 아파트 베란다를 꾸몄습니다. 산을 닮은 돌, 바람을 닮은 풀, 별을 닮은 나무, 이슬을 닮은 꽃. 베란다에 꾸며진 그것들을 볼 때마다 그의 눈은 반짝였습니다.
    ‘이놈들은 내 인생이야. 이놈들을 진심으로 가지고 싶어. 내 삶의 테두리 안에 이놈들을 데려다 놓고 영원히 같이 하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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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연과 더불어 사는 것은 행복
  • 안성으로 오기 8년 전 일입니다.
    김형극씨에겐 이제 막 중학교 1학년 된 딸이 있었습니다. 공부도 잘하고 엄마 아빠에게 귀여운 짓도 많이 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그런 딸입니다.

    한편 나라 안은 학원폭력이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다며 연일 TV, 신문, 라디오에서 떠들썩했습니다. 여학생이 동료 여학생에게 구타를 당하며 돈을 빼앗기는 모습이 방영되기도 했습니다. 자녀를 둔 부모는 내 아이가 누구에게 해코지 당하지 않을까 노심초사 하던 그런 시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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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설마설마 했는데 김형극씨에게도 걱정하던 일이 발생했습니다. 같은 반 학생 몇 명이 딸을 괴롭히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딸은 동료 여학생들에게 주기 위해 점점 더 많은 용돈을 필요로 했습니다.

    결국 딸은 고민하다가 부모님에게 말을 합니다. 불량스럽기로 소문난 같은 반 아이 몇 명이 괴롭히고 있다, 돈을 빼앗고 화장실로 끌고 가 때리려고도 한다. 새로운 환경에서 괴롭힘 없이 공부를 하고 싶다.

    “그때만큼 딸 때문에 고민했던 적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사실 늘 시골을 동경해 오긴 했지만 실행하지 못했던 건 딸아이 교육 때문이거든요. 남들은 자식 교육을 위해 시골에서 서울로 올라온다는데 우리만 서울에서 시골로 이사를 한다면 이건 반대가 되는 것 아닙니까. 그러던 차에 딸아이가 학교생활로 그런 고민을 털어놓았어요. 그래서 결국 오랫동안 미뤄왔던 시골생활을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안성으로 내려간 김형극씨는 감수성이 예민한 딸이 시골생활에 염증을 느끼지 않을까 노심초사 했습니다. 하지만 딸도 부모를 닮았던지 용케 시골 환경에 친숙해져 갔습니다. 도리어 딸은 자연과 더불어 사는 것이 사람에게 얼마나 큰 행복이 될 수 있는지 깨달게 되었다고 털어 놓기 까지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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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골사람과 도시사람의 차이
  • 처음 안성쪽으로 이사왔을 때 많이 힘들었다고 김형극씨는 고백합니다. 앞집 뒷집 사는 사람이 격의 없이 너나들이 하고 니땅 내땅 구분없이 서로 필요하면 나누어서 사용하는 것이 시골 사람임에 비해, 서울 사람은 상하직분의 위계가 확실하고 니것 내것의 소유개념이 확실합니다. 첫 갈등의 원인은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안성에 터전을 막 잡기 시작한 얼마 후 앞 정원에 나무들을 심었는데 그 나무들의 가지 일부가 자라면서 울타리 밖으로 삐져 나갔습니다. 그런데 마을의 한 농부가 양해없이 가지를 쳐 버렸던 것입니다. 애써서 키운 과수였는데 가지의 절반이 잘려 나가자 놀란 김형극씨가 그 농부에게 항의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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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런데 농부는 도리어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며 마을 사람들이 지나는 길을 나뭇가지가 막고 있기에 잘라냈다고 대답을 하고 얼른 그 자리를 떠 버렸습니다. 그때 알았습니다. 김형극씨가 잘못했던 건 나무를 잘못 심었던데 있는 게 아니라 시골 사람의 생활을 잘 몰랐던데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김형극씨는 도시 사람의 정서로 시골생활을 하려 했던 자신의 오류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제는 어디 가서든 당당히 안성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산에 살던 산풀이 들로 이식되면 들풀이 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들풀이 산의 자양분과 산의 물과 산의 공기를 그리워해서야 어디 되겠습니까. 서울 사람이 안성으로 이식되어 안성 사람이 된 만큼 안성의 자양분과 안성의 물과 안성의 공기를 먹고 살아야 하는 건 당연합니다. 그것이 곧 완전한 융화지요.”

    김형극씨는 땅을 바꿀 경우 부작용이 있다고 말합니다. 원래 살던 땅을 그리워하면 영영 그 땅에 터전을 잡기 힘들다는 말이었습니다.
    자라나고 지나온 것은 그냥 삶의 흔적일 뿐 되돌리려 해서는 안 된다, 중요한 건 앞으로 살고 걸어 나가야 할 ‘길’이라는 뜻이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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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20년 동안 준비한 전원생활 - “준비하는 자만이 성공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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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결혼 전부터 전원생활에 대한 꿈을 키워 무려 20년 동안 준비해온 부부가 있습니다.
    집안 구석구석에 배어있는 준비된 자의 전원생활 비결. 경제적인 문제도 스스로 자급자족하며 3년째 시골에서 생활하고 있는 두 부부의 성공담을 들어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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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성만 · 김문정씨 부부의 전원주택은 영동고속도로 새말나들목을 빠져나와 치악산 입구에서 3분정도 떨어진 거리에 있습니다.

    대학에서 조경을 전공한 이성만씨는 지금으로부터 30여 년 전 대학생활 중 건축 강의를 듣고 전원생활을 결심하게 되었고, 역시 조경을 전공한 부인 김문정씨와 의기투합, 결혼도 하기전에 전원생활에 대한 구체적인 마스터플랜을 짜기 시작했습니다.

    80년도에 결혼한 이 부부는 결혼 2년 전인 78년도부터 구체적인 전원생활 준비에 착수했습니다.
    당시 국가적 정책으로 진행되었던 ‘경제개발5개년계획’처럼 5년을 주기로 차근차근 계획을 세워나갔습니다.
    부지매입과 건축을 위한 비용 조달, 수입원이 될 수 있는 아이템 선정 및 구상에 각각 5년을, 마지막 5년은 먼저 준비한 세 가지 사항의 시장성과 수익성을 분석하는데 투자했습니다.

    처음 선택은 실패
  • 이씨 부부에게 집을 지을 부지를 선정하는 것은 지금의 창업을 하려는 여느 사람들의 고민과 비슷한 것이었습니다.
    자신들 거주지의 교통, 인구, 문화적인 측면까지 고려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시행착오를 겪은 것도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처음에 선정하여 매입한 부지는 이씨 부부가 계획했던 전원생활에는 부적합한 부분이 많았던 것입니다.
    그 부적합한 부분은‘전원생활=은둔생활’이라는 잘못된 사고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바로 접근성이 용이하지 못한 점이었습니다.
    인적이 드문 한적한 곳에 부지를 매입하고 보니 외부에서 오는 손님들이 찾기 힘들고 외부와의 교류도 힘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영동고속도로 새말나들목에서 한두 번의 전화 통화로 쉽게 찾아올 수 있는 지금의 집터를 장만하게 되었습니다.
    원주시내와는 17km거리에 있어 생필품 등의 조달이 용이한 장점도 갖고 있는 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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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즐길 수 있는 일이 돈벌 수 있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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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0여 년 전 대학시절 건축 강의를 듣고 ‘성공하는 전원생활’을 생각했다는 이성만씨.
    가장 해결하기 힘든 부분이 자급자족의 문제였습니다.

    ‘취미생활로 돈을 벌 수 있다면 가능하지 않겠는가’라는 생각에 도달하게 되자 부인 김문정씨와 돈벌 수 있는 일을 준비하기 시작했습니다.

    유행 안타는 고(高)부가 아이템 선정
  • 우선 ‘어떤 아이템을 선정할 것인가’가 가장 고민되는 부분이었습니다.
    결국 두 사람의 의견이 일치된 부분이 천연염색과 미술품 전시 판매 등 부가가치가 높고 시기를 잘 타지 않는 상품들이었습니다.

    의견의 합의를 본 두 사람은 실천에 옮기는 일만 남았다고 생각했습니다.
    먼저 부인 김씨는 대학을 마친 뒤 대학원에 진학, 섬유예술을 전공하였고 현재 천연염색을 이용하여 수입창출에 활용하고 있습니다.
    천연염색은 이씨 가족의 주 수입원이 되고 있으며 천연염색 강좌, 동호회를 통한 워크숍 등을 열어 판매까지 이끌어가고 있습니다.
    또 다른 수입원은 5년의 준비기간 동안 하나하나 구입했던 미술 소장품을 갤러리에 전시해서 판매하는 것입니다.

    사전 시장조사 결과 인근 지역에 사설 갤러리가 없다는 점도 도움이 되어 주말에는 방문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고 합니다.
    찾아오는 손님을 위한 카페도 2층에 마련하여 운영하고 있습니다.
    끝으로 남는 부지를 이용한 식생활의 자급자족을 해결한 점입니다.
    부지매입에 실패했던 땅을 팔지 않고 고추, 마늘, 파, 상추 등의 야채는 물론 천연염색에 필요한 재료를 재배하는데 이용하고 있습니다.

    부지런하지 않은 자 성공을 원하지 말라
  • 20여 년간 준비하면서 쉬지 않고 해온 것이 바로 훈련이었습니다.

    새로운 염색 기법과 염료 추출에 대한 연구를 하고 부지를 매입한 뒤에 직접 조경을 꾸미기도 했습니다.
    농작물을 재배할 부지를 선정하고 나서는 매일 새벽 5시에 일어나 밭으로 향해 아침의 절반을 쟁기와 호미질로 보내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는 생활을 반복했습니다.

    이씨 부부의 손은 대학원까지 전공한 석학의 손이라고 믿기지 않을만한 여느 시골 농부와 같은 손이었습니다.
    이성만씨는 노력의 결과를 다음과 같은 말로 표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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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지런하지 않으면 성공하지 못합니다.”

    자신의 손이 직접 온 집안을 만들고 가꾸어 나가면서 성공은 시작된다는 말일 것입니다.

    이씨는 건축을 위한 시공업체 선정도 신중하게 결정했다고 합니다.
    여러 업체가 지은 집을 직접 찾아가서 보기도 하고 사진을 통해 비교해 보며 자신의 구상과 일치하는 부분이 많은 업체에게 시공을 의뢰했습니다.

    또한 전원생활을 컨설팅하는 관계자 및 업체에게 ‘부추겨서는 될 일이 아니며 현실적으로 준비하도록 유도해야 할 것’이라 당부하고 ‘성공한 전원생활의 한 표본으로 남기위해 노력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전원생활 성공 키워드 일문일답
  • Q : 자신의 전원생활을 평가하신다면?
    A : 전원생활은 숨어 지내는 은둔생활이 아닙니다.
    내 가족의 생계를 이끌어 나간다는 것은 숨어 지내면서 해결하기에 힘든 일이기 때문입니다.
    숨지않고 표면으로 드러나는 전원생활에 주력한 것이 수입과 연결되어서 이루어낸 성과라 생각합니다.

    Q : 전원생활을 꿈꾸는 후배(?)들에게 한마디 조언을 부탁드립니다.
    A : 전원생활은 많은 시행착오를 겪게 됩니다.
    따라서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합니다.
    성급하게 생각하지 않고 차근차근 준비하는 여유를 당부하고 싶습니다.

    Q : 아드님이 도예를 전공하신다고 들었습니다.
    A : 아들(22세)이 중학교 1학년 때 의상디자인을 하고 싶어 했습니다.
    하지만, 저희 가족의 수입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일을 시키고 싶어서 도예를 전공하길 원했고
    오랜 설득 끝에 지금은 대학에서 도예를 전공하여 수입에 일조하도록 할 계획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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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숲속 작은 집’의 행복한 집짓기 - 자연을 거스르지 않으려는 마음으로 짓는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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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원생활을 꿈꾸던 이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10년간의 준비를 거쳐 이제 막 그들의 꿈이 이루어지려 합니다.
    꿈을 이루기 위한 노동은 행복합니다. 그렇게 행복한 집짓기를 몰래 훔쳐보고 왔습니다.
    강원도 홍천군 내촌면 답풍리에 위치한 ‘숲속 작은 집’이 바로 그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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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홍천강을 따라 철정검문소에서 오른쪽으로 돌아 쭉 가면 내촌면에 닿습니다. 그리고 길을 따라 오른쪽으로 흐르던 홍천강은 지류인 내촌천에 닿습니다. 그 내촌천을 외롭지만 따뜻한 눈으로 바라보는 백우산의 흙집을 한 채 발견하게 됩니다.

    ‘숲속 작은 집’은 전춘석(46)·김난미(44)씨 부부의 오랜 숙원으로 마련한 보금자리입니다. 10년간이나 전국을 찾아다니며 보금자리 세울 땅을 구하다 첫눈에 반해 마련한 곳이 바로 강원도 홍천입니다. 일만 팔천평의 산야에 자리 잡은 자그마한 집이지만 손수 흙집으로 짓는 것이기에 그 애착은 말로 다 할 수 없습니다.

    홍천에 터를 잡기 전에 개인택시를 몰던 전춘석씨는 서울토박이입니다. 그럼에도 그가 시골에 대한 향수를 가진 것은 그가 개인택시를 몰기 전의 직업 때문입니다. 그는 과일장사를 했습니다.

    전국을 돌며 농민들과 만나며 직접 과일을 수매하면서 흙 얘기를 듣고 그들의 어려움을 몸소 느낄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그는 순수 서울토박이임에도 불구하고 어느 순간부터 농민들과 한 몸이 되었습니다.

  • 우여곡절 끝에 시작된 집짓기
  • 어떤 집인들 쉽게 짓겠냐 만은 ‘숲속 작은 집’을 짓는 데는 참으로 많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개인택시를 10년 넘게 운전하면서 허리와 무릎에 ‘퇴행성관절염’이란 질환을 얻게 되어 결국 손수 흙집을 짓지 못하고 시공업체에 의뢰해서 짓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올해 2월 23일부터 시작된 공사는 두 달여가 되어 중단되었습니다. 시공업체를 잘못 만난 것입니다.

    100% 흙집으로 짓겠다는 이들 부부의 꿈은 시멘트를 좀 섞으면 좀 편하다느니 하면서 집짓기를 설렁설렁 하려는 시공업체의 안일함 때문에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더구나 전춘석씨 혼자 그 많은 인부들의 세끼 식사와 간식을 준비한다는 것은 더할 수 없는 노동이었습니다.

    결국 전춘석씨는 그런 노동을 내집 짓는데 쓰겠다는 생각에까지 이르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다시 시작된 집짓기는 시공업체가 마음에 들지 않게 만들어 놓은 것을 제거하는 일부터 시작되었으니 어려움은 배가 된 셈입니다.

    ‘숲속 작은 집’이 부부에게 더욱 특별한 이유는 집의 설계를 부인 김난미씨가 직접 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물론 그녀는 집 설계와는 무관한 사람입니다.

    그녀의 집 설계는 순전히 공부를 통해서 이루어 진 것입니다. 그렇기에 집을 짓는다는 것은 더없이 많은 시행착오를 겪어야 했습니다.
    남편 역시 흙집 짓는 방법을 책과 인터넷을 통해 공부했으니 그 어려움은 두말 할 나위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이들의 집짓기는 행복하기만 합니다.

    하루 일이 끝나고 집 옆으로 흐르는 계곡물에 몸을 담그면 한낮 더위와 싸우며 일하던 어려움은 어느새 뿌듯함으로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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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행복하게 집지으며 병도 고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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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들의 집짓기는 이제 마무리 단계에 있습니다. 처음 시공업체와의 계약으론 이미 마무리 되었어야 하지만 처음부터 다시 시작 하다 보니 시간이 많이 지난 것입니다.

    더구나 흙벽돌을 쌓으면 또한 편해 질 수도 있겠지만 그들은 바닥도 벽면도 모두 고운 황토흙을 빚어 만들었습니다. 그렇기에 시멘트 바닥이라면 하루 이틀이면 마를 것도 10일이 지나도 잘 마르지 않습니다. 또 그렇게 마른 흙바닥과 벽면이 갈라지기를 반복해 다시 흙을 뿌리고 미장하기를 벌써 5회가 넘었습니다.

    지붕과 기둥들은 모두 소나무로 지었습니다. 지붕의 윗면은 검정 옻칠을 했고, 아랫면은 주황 옻칠을 했습니다. 아직까지도 그 옻독 오른 흔적이 선명하게 남아 있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집의 전체 구조는 남향을 한 ‘ㄱ’자 형태입니다. 전체 방의 개수는 6칸으로 되어 있으며 장작을 지필 수 있는 아궁이도 마련해 놓았습니다. 장작을 피우지 않으면 자연스레 기름보일러가 그 일을 대신합니다. 전체 흙집이라고는 해도 지역특성상 겨울 추위에 대비해 창문을 이중으로 했습니다. 물론 흙집과 어울리는 창을 달았습니다.

    또 흙집에 어울리는 붙박이장을 마련해 놓았습니다. 무엇보다 마음에 드는 것은 천장에 별도의 유리창을 달아 하늘을 바라볼 수 있게 했다는 점입니다.

    2층으론 집과 산을 나무다리로 연결해 놓았는데 그것은 차후 만들 정자로 가는 길입니다.
    흙집을 다시 짓는다면 그들 부부는 더 잘 지을 수 있을 것 같다며 잔잔하게 웃음 짓습니다. 아직 마무리 되지는 않았지만 그동안의 집짓기가 힘은 들었어도 그래도 행복한 것이었다는 말로 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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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더구나 전춘석씨는 흙집을 짓는 과정에서 퇴행성관절염에서 벗어났습니다. 전춘석씨는 “편안함 만을 추구하는 것이 결국 몸도 마음도 병들게 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전춘석씨는 또 말 합니다.

    “비록 만 팔천평의 조그만 산이지만, 제 땅이니까 … 내가 훼손하지 않으면 지금 그대로 이곳은 언제나 깨끗하고 아름답게 지켜질 겁니다.”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는 말은, 그 아름다운 꽃을 지키려는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어려움 속에 먼길 달려와 자원봉사를 해준 ‘시골을 꿈꾸는 사람들(부부가 활동하는 인터넷 동호회)’에 대한 감사의 말도 부부는 잊지 않았습니다.

    ‘숲속 작은 집’은 아직 미완의 집입니다. 자연이 그렇게 쉽게 완성이 되지 않듯 ‘숲속 작은 집’도 자연을 닮아가기 위해 영원히 미완으로 남을 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다음에 이곳을 찾았을 때 ‘숲속 작은 집’이 백운산에 동화되어 찾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염려를 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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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누운 풀처럼 자기를 낮춘 시골의 삶 - 부부가 직접 지은 전원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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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손수 만든 물건에 애착을 갖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것이 하잘것 없는 물건이 아니라 집이라면 더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세이재(洗耳齎)’는 김광환(52)·김영희(45)씨 부부가 직접 짓고 그 짓는 과정에 자신을 아끼고 사랑해 주는 이들이 함께 한 애정 어린 전원카페입니다.
    주인장이란 이름만 잠시 빌리고 있을 뿐 세이재는 부여군 은산면 거전마을 모두의 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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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원카페 세이재에 들어서면 우선 주인장인 김광환씨의 외모에 놀라게 됩니다.

    그의 키가 자그마치 190Cm에 이르기 때문입니다. 농구선수처럼 큰 키 때문에 위압감이 들지만 얼굴을 자세히 보면 개그맨 전유성씨와 많이 닮아 있어 친근감이 듭니다.

    그에 반해 안방마님인 김영희씨는 키가 큰 남편 때문인지 작은 키가 아님에도 더없이 왜소해 보이기만 합니다.

    하지만 그녀의 커다란 눈망울이 지닌 뚜렷한 시선은 남편이 가진 큰 키와는 다른 당당함을 느끼게 합니다.

    김광환씨는 농구선수처럼 큰 키만큼이나 재미있는 이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농구선수처럼이 아니라 실제로 그는 농구선수였습니다.

    김영희씨 역시 남편의 이력만큼이나 특이한 경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녀는 이곳에 내려와 살기 전에 대전에서 음악선생님으로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녀의 취미는 옛 물건들을 모으는 것입니다. 그렇게 모은 수집품들이 지금은 고스란히 세이재를 돋보이게 하는 장식품으로 쓰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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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년으로 돌아가고픈 회귀본능에 이끌려
  • 8년 전 대전에 있다가 아버님의 병환으로 김광환씨는 홀로 내려와 아버님의 병환을 돌봤습니다.

    그리고 3년 전 어머님이 그렇게 외로이 떠나신 것이 못내 잊혀지지 않으셨는지 아버님도 어머님 곁으로 가셨습니다.

    그리고 덩그러니 남은 김광환씨는 태어난 집의 마당에 앉아 집 앞으로 흐르는 지천을 바라보며 앞으로를 생각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생각에 빠진 지 8년째라고 웃음으로 대답합니다. 그리곤 이내 진지하게 말을 합니다.

    “회귀본능이겠지요. 농구를 하고 건설업에 종사하면서 느낀 직장 생활에 대한 내 자신의 한계에 부딪치면서 자연스레 유년시절의 그리움에 닿았던 겁니다.

    그리고 그런 향수에 저는 다시금 이곳을 찾게 된 거구요.” 그의 표정은 이미 천진난만하던 유년을 그리는 듯 합니다.

    그런 시선을 느꼈는지 그는 이내 웃음으로 ‘그럼 지금의 생활에 만족하냐’는 질문을 하기도 전에 미리 답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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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귀를 씻고 몸을 깨끗히
  • 수북한 나무들에 둘러싸여 있는 세이재는 이름만큼이나 조용히 살기를 바라는 냥 묵묵히 오고가는 사람들만이 알게끔 지어진 비밀장소 같습니다.

    그럼에도 막상 세이재에 당도하면 커다란 항아리들을 끼고 넓게 펼쳐진 잔디밭을 보면 마음이 그렇게 편안해 질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타박타박 잔디밭을 걸어 들어가면 우측으로 바로 보이는 집이 세이재 사람들이 묵는 보금자리입니다.

    그리고 그 옆에 흙집으로 지은 세이재를 만나게 됩니다. 사실 외형은 여느 시골에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함을 느끼게 됩니다.

    세이재로 들어가는 문엔 ‘밀어유’라는 친밀한 말로 들어오라는 인사를 합니다.

    문을 열고 들어선 세이재는 여느 시골의 그것이 아님을 한눈에 확인할 수 있게 됩니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화분들과 직접 손으로 빚은 용기들입니다. 또 주인장이 직접 만들었다는 조명도 세이재를 찾은 이에게 색다른 멋을 보여 줍니다.

    글을 쓴 창호지에 은은한 빛이 있는 조명은 썩이나 마음을 편안하게 합니다. 어릴 적 시골 외가에서나 볼 수 있었던 이러한 소품 하나하나가 세이재를 더욱 따스하게 만듭니다.

    세이재에 장식된 소품들은 주인장 김광환씨가 직접 만들거나 안방마님인 김영희씨가 수집한 것들입니다.

    탁자 칸막이에는 베를 짤 때 풀을 먹이는 데 쓰는 도구가 있는데 마치 여자들이 화장할 때 쓰는 큰 브러쉬 같아 재미있습니다.

    옛것들의 쓰임새를 생각하면 선조들의 지혜에 감복을 받습니다.

    세이재는 ‘귀를 씻고 몸을 정(淸)하게 한다’는 뜻입니다.

    황희 정승이 나라에서 벼슬이 내려졌을 때 듣지 못할 말을 들었다며 그것을 다만 듣지 않은 것으로 하겠다는 데에서 유래된 말입니다.

    조용히 살고자 하는 마음을 담은 말입니다. 김광환·김영희씨 부부가 세이재를 열면서 바라던 마음입니다.

    세이재에는 소박한 한지에 멋스럽게 먹으로 적은 눈에 띄는 문구가 있습니다. ‘나는 전유성이 아닙니다’ 대전방송의 모 광고에선 전유성씨가 나와 떠드는 아이들과 함께 서점에 와도 좋다는 카피가 있었답니다.

    그것을 보고 전유성을 닮았다는 말을 자주 듣는 김광환씨가 그 밑에 조그맣게 세이재에선 아이들이라도 다른 사람들을 생각해서 조용하기를 바라는 글을 재미있게 적어 놓은 것입니다.

    왜 세이재에 그런 문구가 있는 지를 이제야 알 것 같습니다.

  • 누운 풀처럼 자기를 낮추고
  • 진정한 전원생활에 대한 해답은 아마 없을 겁니다.

    하지만 세이재의 김광환·김영희씨 부부의 사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진정한 전원생활이란 것에 해답이 있다면 아마도 저런 모습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들은 그들만의 세상에 자신의 이기를 발하지 않고 시골의 생활 속에 있는 모든 주위 사람들과 어우러지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 그들 부부는 언제나 ‘누운 풀’이 되고자 합니다.

    삶에 있어서 지금까지도 그래왔고 앞으로도 그러기를 바라는 세이재의 마음을 마지막으로 전해 봅니다.

 

출처 : 토지사랑모임카페
글쓴이 : 김선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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