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지리산둘레길

[스크랩] 지리산 동부능선의 역사 스케치

지리산자연인 2008. 1. 15. 07:43

지리산 천왕봉에서 밤머리재 까지를  

                                     

                          통상 동부능선이라 일컫는다.  

 

   
▲ 글쓴이:류정자(지리99.com회원)지리산의 문화와 역사를 탐구하는 지리산꾼.
 실측거리는 20여Km, 50리 남짓 길이지만 동부능선이 안고 있는 역사와 문화는 남한 최대의 산인 지리산을 뛰어넘는다.
 지리산 어느 길 어느 자락이 좋지 아니한 곳이 있으랴만 지리산 종주 산행의 대미를 장식하는 동부능선만큼 지리산 마니아들로부터 사랑 받는 곳도 드물다. 칠선계곡, 중봉골, 조개골 등 지리산의 걸출한 골짜기들도 다 동부능선의 발치에 있으며, 산꾼들의 마지막 힘과 초인적인 인내를 요구하는 황금능선과 초암능선도 이 능선에 머리를 대고 있다.
물경 조선시대 부터 산꾼들에게 등산로를 열어준 동부능선은 거느린 골짝마다 조선의 역사가 배어있고, 넘 는 고개마다 목 좋은 반석마다 옛 선조들의 선비문화와 민초들의 애환이 넘치는 곳이다.
 지리산등산의 장을 열어주었던 옛 선비들은 지금의 우리들에게는 부르기도 감히 두려운 선배 산꾼들이셨다. 500여 년 전, 정확히 1457년 함양군수로 부임해서 선정을 펼쳤던 성리학의 태두 김종직을 필두로, 백년 내지 이백년의 간격으로 남원부사 유몽인, 함양선비 박여량 등이 동부능선의 등산로를 따라서 천왕봉에 오르내린 후에 ‘두류록’이라는 이름으로 지리산의 역사교과서 같은 산행기를 남겼으며, 조선후기에 가서는 진주와 함양 그리고 산청지역의 글깨나 하는 수많은 선비들이 줄을 이었던 길이다.

 근대에 이르러 일제 강점기 때에는 산자락의 함양산청 관리들은 물론 주둔해온 일본인 순사들까지도 천왕봉을 오르기 위해 이 길을 올랐으며 당시에 그들은 새길을 내고 중간에 산장까지 지어가면서 동부능선에서 등산문화의 꽃을 피웠다.

 지리산 현대사에서 잊을 수도 없고 결코 잊어서도 않될 처절한 역사를 남긴 빨치산, 그들도 한국전쟁을 전 후 해서 동부능선에 수많은 족적을 남겼다.
지리산 빨치산역사의 단초(端初)의 장을 열었던 하준수(일명 남도부)가  지리산에 처음 입산 하면서 이용하였던 길도 동부능선이다.
 그는 일경의 눈을 피해 벽송사에서 등산객이라고 속이고 숙박을 제공받은 후 말바우산막을 거쳐 초암능선의 줄기를 따라서 칠선골에 잠입했다고 전한다.
 지리산에서 쇠줄보다 더 질긴 삶을 산 빨치산 정순덕은 13년 산중생활을 마감하는 날까지 동부능선을 휘젓고 다녔다.

 현재는 천왕봉을 오르는 가장 대중적인 산길이 중산리 기점인데 반하여, 이렇듯 예부터 천왕봉을 오르기 위하여 가장 많이 이용한 산길이 동부능선이었다.

 천왕봉을 오르는 각계각층 선인들의 족적이 유장한 동부능선을 산꾼의 입장이 되어 따라가 본다. 

 시작점은 천왕봉 부터이다.

 

 

▲ 중봉에서 사진 찍는 모습 : 중봉에서 바라보는 천왕봉의 웅장한 모습을 담으려는 사진작가들.

천왕봉에서 동북방향으로 길을 잡아 철사다리를 내려서서 힘겹게 한 가플막을 치받아 오르면 중봉이다.
 천왕봉의 어깨 높이에 앉아있는 중봉은 지리산 지붕을 한눈에 담을 수 있는 천혜의  조망대이다.  주능선100리 길이 일망무제로 펼쳐지고, 백리 밖의 반야봉과 노고단도 실루엣으로 다가온다. 하여서 중봉에는 사시사철 지리산을 파인더에 담는 고독한 남자들이 화석마냥 서 있는 모습이 보인다.
 발 아래로는 지리산최대의 비경을 간직한 칠선계곡과 왼 종일 바라보아도 질리지 않는 질펀한 조개골이 좌우에 황천길처럼 뻗어있다. 

      

 암반지대로 이루어진 천왕봉과는 달리 육산으로 이루어진 중봉의 모습을 두고 500년 전 김종직은 ‘토봉(土峰)으로 단중하게 자리 잡고 있다’고 했다. 일제 강점기 때 중봉에는 목기를 만드는 산막이 있어 오고 가는 등산객들의 훌륭한 숙박지였다고 선인들의 기록이 전한다.
 중봉에서 하봉으로 가는 길은 여름이면 천상의 화원(花園)길이다. 코끝에 진동을 하는 수수꽃다리 향기와 해맑은 동자꽃의 유혹에 발길은 수시로 머뭇거린다.

  또한 김종직은 이 길을 상고시대에 바닷물이 넘칠 때 방게가 넘었다는 전설을 지닌 해유령(蟹踰嶺)이라고 했다. 고도변화 없이 거의 수평 이동으로 해유령을 넘으면 동부능선의 하이라이트인 하봉이다. 하봉의 옛 지명은 영랑봉이다. 신라화랑의 우두머리였던 영랑이 3천 군사를 이끌고 올라 호연지기를 키운 곳이라고 해서 영랑봉이라 이름 부쳐졌다고 전한다.  하봉에 깃든 화랑의 전설은 하봉 주변에 남겨진 신라유적지들로 인해서 어느 정도 정설로 입증되고 있다.
 비록 화랑이 아닌 어느 누구라도 천길 단애의 암석들이 불쑥불쑥 솟은 하봉의 정수리에 서면 거대한 지리산이 주는 위압감에 가슴이 열리면서 온몸에 생기가 돈다.   

 

   
▲ 영랑대에서 바라본 중봉과 천왕봉의 위용.
 하봉을 내려서면

              영랑고개이다. 

 앞서 언급한 영랑봉과 함께 신라화랑의 전설에 의해서 이름 부쳐진 영랑고개는 국골과 조개골을 가르는 고개 마루로서, 한국전 직후 정국이 혼란한 틈을 타서 벌목이 성행했던 시절 조개골에 상주했던 수많은 벌목꾼들이 넘나들었던 애환의 고갯길이다.

 

 

 

 

 

▲ 마암 : 지난겨울 마암 밑에서 모닥불을 피우다 낙석으로 인한 인명사고가 나기도 했다.

 영랑고개 안부에서 우측으로 내려서면 물이 귀한 동부능선에서 유일하게 석간수를 공급받을 수 있는 마암(馬巖)에 이른다. 

 마암은 천왕봉의 망해정(望海亭)이라는 산장과 함께 등산객을 위한 지리산 최초의 산장이 세워졌었던 곳이다. 일제 강점기 1923년에 함양유지 이진우(李璡雨)라는 사람이 벽송사 스님들의 인력 도움을 받아 순전히 등산객들의 편의를 위해 산장을 만들었다고 하며, 산장에는 마암당(馬巖堂)이라는 현판을 달았다고 한다. 큰 집채만한 바위의 상단에 마암(馬巖)이라는 힘찬 각자가 새겨져 있는 이곳은 조선중기에서부터 구한말을 거쳐 일제강점기에 이르는 동안 동부능선을 다녀온 선인들의 산행 기에 어김없이 나타나는 지명이다.
 예전에 함양 땅에 가뭄이 들면 이곳 마암의 상단에서 제주(祭主)가 춤을 추면서 기도를 올리면 반드시 비가 왔다고 전한다. 김종직은 함양군수 재임시절 실제로 마암에서 기우제를 올린 상황을 지리산유람록인 '유두류록' 에 다음과 같이 기록을 했다.

『가물 철엔, 사람을 시켜 이 바위에 올라서서 마구 뛰며 배회하게 하면 반드시 뇌우(雷雨)를 얻게 되는데, 내가 지난해와 금년 여름에 사람을 보내서 시험해 본 결과, 자못 효험이 있었다.』

 마암에서 1시간을 지나면 대원사골의 한 지류인 물가에 터 잡은 청이당터를 만난다.
청이당(淸伊堂)은 지난 60년대 까지만 해도 시골의 마을 어귀나 산의 고개 마루에 흔하게 볼 수 있었던 동제(洞祭)나 당산제(堂山祭)를 지냈던 당집이 이곳에 있었던 곳이라고 본다.
 역사 이래로 서낭당 또는 성황당이라고 불렀던 당집들은 비록 무속신앙의 본거지였었지만 민초들의 한과 염원을 풀어놓을 수 있었고 길손들의 역려과로를 달래주었던 곳 이었다.
 산청의 대원사골과 함양의 어름터골을 넘는 쑥밭재 턱밑에 위치했던 청이당 역시 지리산 산신을 모신 서낭당(성황당)이었던 곳으로 그 옛날 지리산 산민들의 애환을 담고 있는 역사터였던 것이다. 
 

 

 

▲ 쑥밭재 : 많은 역사적 발자취를 품고 있는 고개마루.

 쑥밭재를 옛 사람들은  애전령(艾田嶺)이라고 했다.

 약용으로 쓰이는 인진쑥이 많다고 해서 부쳐진 이름이라고 하나 지금은 주변이 산죽 밭으로 변해서 인진쑥은 거의 찾아볼 수가 없다. 한편 쑥밭재는 구한말 지리산 의병들의 근거지로서, 쑥밭재 아래 추성리 출신인 독립투사 석상용 의병대장이 이끄는 의병군과 일군(日軍)과의 접전이 치열했던 격전지였다고 한다.  한국의 독립운동사에도 등재되어있는 쑥밭재 전투는 지금으로부터 불과 100년 전의 동부능선이 안고 있는 지리산 근대사이다.
 지리산이 키워준 우국충정으로 과감히 일군과 맞서왔던 석상용 선열의 영혼은 쑥밭재 아래의 어름터골에서 무덤으로 만날 수 있다.
 거의 평지길 수준인 애전령을 넘으면서 들풀 같은 민초들이었던 지리산 산민들이 만들어낸 지리산 역사를 기억하며 발길은 동쪽으로 이어지는 길을 따른다. 
     

 

 

▲ 독바위 : 독을 엎어놓은 듯한 형상의 웅장한 바위.

 거대한 바위가 영락없이 독을 닮아 옹암(甕巖)이라 일컫는 산청독바위, 산릉이 새의 부리 형상을 한 새봉, 대원사계곡 막바지에 위치한 유평리 새재마을 하산길이 있는 새재, 그리고 외고개를 지나면 지리산 고대사의 축을 이루는 가야사의 전설을 안고 있는 왕등재 성터이다.

  구전에 의하면 성터는 가야의 요새지로서 마지막 임금인 구형왕이 신라의 침공을 피해 이곳에 주둔하였다가 이웃한 왕산으로 넘어갔다고 하는 곳이다.
 오래된 고성(古城)의 흔적이 있는 왕등재 성터는 외성과 내성의 형태로 둘레를 토성 및 석성이 이중으로 감싸고 있으며, 주변에는 기와파편도 볼 수 있다.  

 지금의 성터는 여러 가지의 수생식물들이 자생을 하고 있는 습지로 변하여서 고성의 흔적이 역력한 역사 유적지가 조명도 받지 못한 채 버려진 땅처럼 남아있지만 누가 보아도 이곳은 오래 전에 지리산에 존재하였던 어느 국가의 요새지가 있었던 곳이라고 쉽게 추정을 할 수 있는 곳이다.
 성터가 습지로 변해버린 까닭은 고대의 요새지가 철수되면서 인위적으로 만든 축성과 다져놓은 지형이 세월의 부침과 함께 자연스럽게 지형이 변화되었다고 보아진다.

 한편 왕등재 성터에는 이곳이 지리산 해발 1,000m에 위치한 신비스러운 습지임을 알리는 표지판과 함께 습지를 가로지르는 데크 시설을 국립공원에서 만들어 놓았다. 

 

 

▲ 왕등재습지 : 습지로 변해버린 왕등재 성터.

  성터에서 몇 개의 산모퉁이를 더 돌아가면 진짜 왕등재이다.

 여기서 진짜라는 용어를 쓰는 까닭은 흔히들 방금 지나온 성터를 왕등재로 잘못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아서이다. 구전이 전하는 바에 따르면 왕등재 성터 그곳은 군사들 내지 왕가의 기거지 이며 왕이 이웃한 왕산으로 넘어간 길은 지역민들이 '왕디기재'로 부른다. 이곳이 진짜 왕등재이다. 왕등재는 삼장면의 유평리와 금서면의 지막리를 이어주는 고갯길로서 고대 국가의 수장인 임금의 발자취를 따라서 지리산 산민들이 예전부터 넘나들던 고갯길이다.

 이윽고 성터에 주둔하였던 군사들이 적의 침공을 알리는 깃발을 세웠다는 전설이 전해져 오는 깃대봉이다. 깃대를 세웠다는 너럭바위도 지나는 길손들의 좋은 쉼터로 남아있다.

 깃대봉을 넘어서면 천왕봉에서부터 면면히 이어져온 동부능선의 지리산역사와 헌걸찬 산줄기가 함께 막을 내리면서, 고개가 워낙 길어서 고개를 넘는 동안 밤 한 말을 다까먹는 시간이 걸린다고 하여 밤재 또는 율재(栗峴)라 부르는 밤머리재이다.

 이천년을 넘나드는 삶의 흔적들을 담고 있는 지리산의 동부능선은 일단 여기서 막을 내리며, 서북능선에서 시작하여 지리산의 주능을 거쳐 동부능선까지 달려온 지리산 산행의 백미인 지리산 태극종주의 기나긴 여정은 마지막 웅석봉을 끼고 있는 달뜨기능선으로 그 바톤을 넘긴다.

 이렇듯 동부능선은 인간의 삶이 산과 어우러져 이루어놓은 역사의 보고이며, 역사의 자취를 더듬어가며 땀 흘리는 산꾼들에게 보다 값진 산행의 즐거움을 안겨줄 수 있는 곳이다

출처 : 산을 찾는 기쁨이란
글쓴이 : 나무달마살래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