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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밤이면 박충수(47)·강민희(35)씨 부부는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찻물을 끓인다.
차를 즐겨 마시면서 부부는 산이 가진 ‘독특한 고요함’에 하나가 되어 간다. 잔 속에 말갛게 우러난 차처럼 부부는 자신들을 산속에 우려냈다.
산사의 스님처럼 차를 통해 비움의 철학을 깨닫고 산을 닮아가고 있는 것이다. 지리산에서 만나 인연을 맺은 박씨 부부의 산생활도 올해로 15년째다.
두 사람은 산에서 산다기보다는 산을 마주한다고 말하고 싶어한다.
그 마주함을 통해서 자신들의 ‘마음 살림살이’가 넉넉해졌기 때문이다.
충남 서천이 고향인 박씨는 30대 초반에 술로 망가진 몸을 의탁하기 위해 지리산에 ‘입산’했다. 죽는다면 큰 산에서 그저 표시도 안 나게 남모르게 스러지고 싶었다. 모든 것을 포기하니 두려움도 사라졌다. 한밤중에 들어선 산이 무섭기보다는 잔잔한 호수처럼 마음을 안정시켜 주었다. 왠지 모르게 산에 끌렸던 것이다. 산이 편안했다. 처음엔 머리를 깎으려고 지리산 뱀사골의 한 암자를 지도 한 장 달랑 들고 무작정 찾아나섰다. 안개로 사흘 동안 헤맸지만 허사였다. 인연이 아니라 싶어 발길을 돌린 곳이 지금 사는 지역이다. 행정구역으론 경남 산청군 시천면 반천리. 지리산 자락의 산골마을이다. 산에서 도를 닦는 사람들이 모여 생활하는 곳에서 쌀값만 내고 지냈다. 아내 강씨와 운명적인 만남도 그곳에서 이루어졌다.
대학에서 심리학을 전공하던 강씨가 지리산을 찾은 이유는 자신의 전공에 대한 강한 회의감에서다. 사람들의 심적 고통을 덜어주겠다고 선택한 길이었지만, 인간에 대한 진정한 답은 늘 ‘예외’라는 이름으로 비껴갔다. 게다가 자신도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다른 사람의 마음을 편케 해줄 수 있을지 의문이 생겼다. 차라리 ‘자아 공부’부터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지리산을 찾았다.
알퐁스 도데의 ‘별’에서처럼 두 사람은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며 수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중학교 2학년 때부터 장자에 빠져 ‘왜 사는가’에 천착했던 박씨는 현실에 쉽게 만족하지 못했다. 무엇이든 끝까지 가봐야 직성이 풀렸다. 인간의 한계가 어딘가 갈 데까지 가보는 성미였다. 초능력에 대한 관심과 산사람이 되기 전 3년간 술을 밥삼아 생활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무엇이든 마음이 후련해질 때까진 놓치지를 못한다. 고등학교 2학년 때 버스에 부딪히는 교통사고로 다친 몸도 혼자 요가를 익혀 회복시켰다. 서점에서 요가책을 구입해 새벽에 일어나 책이 지시하는 대로 3개월간 동작을 해봐도 처음엔 쉽게 되지 않았다. 3개월이 지나서야 겨우 동작 하나씩을 익히면서 1년 만에 책이 지시하는 동작을 터득할 정도로 남다른 집념이 있다.

책 말미에 ‘스승이 없으면 시행치 말라’는 충고를 따라 거즈를 입으로 집어넣어 신체를 청소하는 부분만 따라하지 못했다. 덕택에 2년 만에 쇠뭉치로 때려도 괜찮을 정도로 몸이 만들어졌다.
고교 시절 이미 프로이트 책을 섭렵한 박씨의 이런저런 이야기들은 심리학도인 정씨에겐 그동안 풀지 못했던 시험문제의 답을 보는 듯했다. 산에서 오두막을 짓고 텃밭 가꾸며 살겠다는 박씨의 말에 결혼을 결심했다.
교육자 집안의 딸이 학교를 그만두고 어느 날 갑자기 산골 노총각과 결혼하겠다니 집안의 반대는 당연지사. 하지만 정작 박씨가 걱정했던 부분은 행여 정씨의 결정이 한순간에 자신의 ‘ 꾐’에서 이뤄진 것이 아닌가 하는 점이었다. 살아가는 데 한 점 거리낌이 없어야 한다는 신념으로 그는 정씨에게 출가를 권했다. 정씨의 바른 삶과 ,정신세계에 대한 의문을 박씨는 자신의 손바닥으로 가려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스스로 할 수 있는 데까지 해볼 기회를 주고 싶었다. 태양을 손바닥으로 가릴 수 없듯이.
정신세계의 동반자로서 서로의 영적 진화에 보탬이 돼야 한다는 확고한 기준이 있었다. 박씨는 정씨를 법주사 수정암으로 이끌었다. 얼마 후 강씨는 산을 내려와 결혼을 결심하고 박씨의 고향을 방문한다. 하지만 집안의 반대는 더욱 거셌다. 두 사람을 떨어뜨려 놓으려고 이번엔 강씨의 부모가 내장산 원적암으로 강씨를 보내버린다, ‘유배’였다. 박씨는 보물찾기 하듯 정씨를 수소문해 보았으나 거처를 알아내지 못했다. 엄하게 자라 부모의 뜻을 거스를 수 없없던 강씨는 한동안 박씨를 잊어 보려고 무진 애를 써 보았으나 허사였다. 정씨는 전화로 박씨에게 거처를 알리고 함께 살자고 말했다.
산에 오두막을 짓고 두 사람은 신접살림을 차렸다. 전기도 없이 촛불을 켜고 살았다. 하루 종일 부부간 도란도란 나누는 얘기만이 공간을 채웠다. 나무하러 산에 오르거나 텃밭을 가꾸러 나설 때면 두 사람은 늘 손을 꼭 잡았다. 전기뿐 아니라 전화도 없이 산속에 두 사람만이 사니 같은 취미 하나쯤은 있어야겠다는 생각에서 부부는 북과 장구를 배웠다. 요즘엔 길이 좋아지고 자주 산 아래 마을을 내려다니다 보니 사람만 바빠졌다. 두 사람은 분위기 있었던 ‘촛불시대’가 가장 행복했다고 추억한다.
박씨는 산생활을 시작하면서 맨 먼저 그동안 받아 놓았던 명함을 태워버렸다. 원하건 원치 않건 얽히고설켜 떠밀려 가는 얽매임에서 탈피하고 싶었다. 번거로움이 우선 없어졌다. ‘나의 삶’이 비로소 가능했다. 도회지에선 몇 사람의 점심값에 지나지 않는 10만원이 산골에선 크게 쓰인다. 생각만 바꾸면 많은 시간을 즐기면서 살 수 있다는 사실도 산속 생활을 통해서 터득한 수확이다.

◇산은 사람들의 모습마저 편안하게 만든다. 집을 나서는 박씨 가족의 표정이 유난히 밝고 평화롭다.(사진위) 박충수씨가 지은 전남 순천 연동마을의 황토목조집. 주인 심재중씨는 여러 번 직접 박씨를 찾아가 집짓는 일을 부탁했다.
중학교 1학년인 큰딸 고운이가 3살 때 부부는 결혼식을 올렸다. 친정 부모들도 황토나무집을 부부가 손수 지을 때 손을 보탰다. 본래 집이란 것은 추울 때는 따뜻하고 더울 때는 시원해야 한다. 이를 가장 잘 소화해 낼 수 있는 자연소재가 바로 나무와 흙이다. 따끈한 황토방에 누우면 피로가 확 풀린다. 웰빙이 따로 없다. 대들보 등 기본 틀은 전통적 한옥을 따랐으나, 본채 마루 화장실 부엌을 한곳에 통합시켜 생활의 편리를 도모했다. 대들보엔 아이들을 위해 그네를 걸었다. 방 하나는 장작을 땔 수 있는 온돌과 보일러를 함께 설치했다. 기름을 구할 수 없는 천재지변을 대비해서다. 물 등 전기가 끊어져도 기본 생활은 가능토록 했다. 현대문명은 스위치 하나만 꺼져도 아수라장이 되는 허약한 ‘스위치 문명’임을 경계하는 뜻도 담겼다.
이중 창 안쪽의 한지창과 황토 내부벽돌, 그 위에 발라진 한지가 분위기를 살려줄 뿐 아니라, 집을 숨쉬는 생명체로 거듭 나게 했다. 장마철에는 습기를 빨아들여 뽀송뽀송하고 겨울철엔 적절한 습도를 유지시켜줘 가습기가 필요없다. 기자가 하룻밤을 자고 나니 몸이 날아갈 듯 가볍다.
산골 생활에서 가장 큰 걱정거리는 자녀교육. 하지만 최근엔 사정이 많이 좋아졌다. 일부러 산골을 택한 의식 있는 박사급 교사들이 늘고, 통학버스도 생겨 웬만한 도회지 학교보다 오히려 교육환경이 좋다. 무엇보다도 박씨 부부는 아이들에겐 자연 만큼 큰 스승은 없다고 생각한다. 눈에 들어오는 산야가 스승이다. 둘째딸 진아(초등2)는 스쿨버스가 오는 산 아래까지 30분 정도 걸어야 하지만 힘들어 하는 법이 없다. 오가며 들꽃, 들짐승과 대화하는 법을 아이들은 터득해 가고 있다.
부부는 아이들이 자연에서 정직함을 배우기를 바란다. 용돈을 따로 주지 않고 일한 만큼 주는 것도 삶에 대한 정직함을 체득케 하려는 배려다. 풀뽑기, 개밥주기, 쓰레기 버리기, 빨래 널기 등 일에 따라 ‘임금’이 100원부터 500원까지 정해져 있다. 아이들은 한달에 한번씩 자신들이 한 일을 적어 용돈을 청구한다.
박씨 부부는 진아가 지은 시 하나를 거실벽에 붙여 놓았다. 제목은 ‘사는 법’.
“아 그리운 세월이여 되돌릴 수도/ 얻을 수도 없음인가/ 눈깜짝할 새가 그리운 세월…/ 웃어라 웃으면 복이 온다/ 세월은 지나쳐도 복과 덕은 쌓을 수 있는 법/ 악한 사람 뉘우쳐 주고/ 착한 사람에게 배우며/ 그렇게 생에 따라 잠들어라/ 남이 무얼하든 탐내지 마라/ 탐내는 것에서 욕심이 생긴다.”
처음엔 부모도 선생도 진아가 이런 어른스러운 것을 썼다니 믿을 수 없었다. 하지만 진아는 공책 하나를 이런 시들로 꽉 채우고 있다. 자연이 아이들의 마음밭을 일구고 있는 것이다. 부부는 아이들의 이런 깊은 심성이 자라나는 세대에겐 큰 자산(경쟁력)이 되리라 믿는다.
산속에 산다면 사람들은 묻는다. 뭘 먹고 돈은 어떻게 버느냐고. 먹기 위해 만들고 남는 것만 팔아도 산에서 쓸 만큼의 돈은 들어온다. 건강을 위해 죽염을 직접 만들어 먹고 일부는 주변의 지인들에게 선물도 하고 팔았다. 요즘엔 곶감이 돈이 되고 있다.두달 만 열심히 일하면 1000만원 이상 수입이 된다. 산생활은 1년에 2000만원만 있으면 도시 1억 연봉자가 부럽지 않다. 산생활은 몸을 조금만 움직이면 지천에 깔린 것이 먹을거리다. 버섯도 그 중 하나다. 최근 아내 강씨는 간식거리로 한과를 배워 만들고 있다. 일부는 설날 선물용으로 팔 계획이다.
남편 박씨는 대나무 밭에 자생하는 찻잎을 따 직접 녹차를 만들어 마신다. 찻입을 덖을 때 향이 유별나다. 감칠맛 나는 뒷맛이 재배 차와 비교가 되지 않는다. 차를 좋아하는 이들이 너도나도 마셔보기를 원하지만 양이 적어 부르는 게 값이다.
그는 산에 들어와 살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이런 충고를 한다. “돈을 목적으로 출발하면 절대 실패합니다” 필요한 것들을 재배하고 만들어서 주변의 가까운 이들과 나누고, 남은 것은 팔아 생활에 보탠다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자연과 벗삼는 생활을 위해선 이것저것 다 할 줄 아는 부지런한 종합형 인간형이 요구된다. 분업형 인간을 고집한다면 자연과 불화할 수밖에 없어 적응하기 어렵다.
박씨가 어느 날 길을 지나다 한옥 짓는 현장을 목격하고 바로 찾아가 목수일을 배우기 시작한 것도 전천후 삶을 위해서다. 천성적으로 나무 다루는 일이 빨라 10여년 만에 제자를 거느린 도목수가 됐다. 여기저기서 집을 지어달라는 요청이 많아도 산생활을 즐기는 것에 방해가 되지 않는 정도만 일한다.
부부와 두 딸이 살고 있는 2층 황토나무집의 창문을 여니 지리산 준봉들이 한눈 가득 쏟아져 들어온다. 천왕봉이 저만치 우뚝 서 있다. 부부가 나란히 창가에 걸터앉으니 등 너머 산풍경이 한 폭의 풍경화처럼 배경이 돼준다. 마치 풍경화 앞에서 사진을 찍는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하루 종일 우두커니 바라봐도 싫증이 나지 않는 것이 산이라고 부부는 말한다. 아침햇살을 받아 벌건 천왕봉은 상기된 어린애 얼굴 같다. 산은 늘 같은 얼굴을 보여주지 않는다. 시간과 계절에 따라 변화무쌍하다. 연초록이 산정상을 향해 치달으면 여름이고, 갈색이 산 아래로 내려오면 겨울이다. 그렇게 한해가 지나간다.
부부는 지리산에게서 변화의 가르침을 배웠다. 산은 미움과 증오를 사랑으로 변화시키라 한다. 아무리 다투고 미운 사람이라도 다음날 다른사람으로 바라보게 되면 응어리가 만들어지지 않은 것을. 부부사이도 마찬가지다. 지리산이 박씨 부부에게 말을 건넨다. 늘 새롭게 서로를 바라보라고. 천왕봉은 늘 새롭다. 박씨 부부가 지리산에 몸을 박고 사는 까닭이다.
글 산청=편완식
그래픽 손동주 기자 wansik@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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