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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심원 별채인 흙집은 작설차를 마시면서 책을 읽고 쉴 수 있는 공간이다.
세심원엔 널찍한 거실과 차 마시는 방, 그리고 잠자는 방이 두 칸 있다. 별채인 흙집에는 작설차를 마시면서 책을 읽고 쉴 수 있도록 꾸민 방이 두 칸 있다. 전국 제일의 축령산 휴양림에서 나온 편백나무로 바닥을 깔아 집안에 있으면 편백나무 향기에 정신이 맑아지는 게 느껴진다. 이런 향기 나는 바닥에 드러누워 자면 숙면을 취할 수밖에 없다. 피로를 푸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땅의 기운과 공기가 좋은 곳에서 숙면하는 것이다. 필자도 편백나무로 된 바닥에서 자보기는 처음이었다. 그동안 바위에서 올라오는 지기(地氣)의 효능에만 초점을 맞췄는데, 나무바닥의 좋은 점을 새롭게 인식하는 계기가 됐다.
황토, 숯, 죽염
대학원생 시절 답사를 다니면서 조선시대에 만석꾼 집에서는 방바닥에 소나무에서 나오는 송진을 깔았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은 있다. 하인들을 시켜 채취한 송진을 방바닥에 두껍게 칠하고, 중간중간 솔잎을 깔았다는 것이다. 송진을 칠하고 솔잎을 뿌리고, 그 위에 다시 송진을 입히고, 솔잎을 뿌리는 식이다. 이렇게 하면 송진과 솔잎이 시루떡처럼 층을 이루는데, 두께가 5∼6cm 될 때까지 계속하면 방안에 송진 냄새가 가득 찬다. 송진 냄새와 솔잎향이 가득 찬 방에는 여름에도 모기나 파리가 날아들지 않았다고 한다. 거기에 더해 서까래, 문틀, 가구의 재료를 홍송(紅松)으로 하면 소나무 냄새가 방안에 진동한다. 홍송의 기분 좋은 냄새와 송진 냄새가 어우러진 방은 생각만 해도 환상적이다.
지금은 조선시대처럼 송진이나 홍송을 구하기가 어렵고 인건비도 워낙 비싸 조상들이 그런 방을 만들어 살았다는 사실이 부러울 뿐이다. 세심원의 편백나무 향을 맡으면서 조선시대 송진방(松津房)의 호사가 생각났다. 죽기 전에 이런 호사는 한번 해야 하는 것 아닌가! 세심원 바로 옆에 대규모 편백나무 숲이 있어서 편백나무를 구하기가 수월했다. 편백나무 숲은 매년 일정구역을 간벌(間伐)하기 때문에 이때를 이용하면 간벌한 나무를 싸게 사들일 수 있다.
세심원 바닥의 다른 특징은 편백나무 밑에 무려 2t의 숯을 깔았다는 점이다. 흙집에는 벽에 1t가량의 숯을 집어넣었다. 숯만 넣은 것이 아니다. 숯 밑에 죽염도 넣었다. 세심원을 지을 때 가장 밑바닥에 황토를 깔고, 그 위에 죽염을 깐 다음 숯을 얹은 것이다. 숯의 두께만 7cm. 그 위에 1cm의 공간을 남겨두고 편백나무 마루를 깔았다고 한다. 이 정도면 조선시대 만석꾼의 송진방에 밀리지 않는다. 비록 송진은 없지만 대신에 숯과 죽염이 들어가지 않았는가.
일단 저질러라!
숯은 습도 조절에 탁월하다. 습기를 잘 머금어서 마룻바닥이 장마철에도 항상 뽀송뽀송한 느낌을 준다. 그런가 하면 숯은 속이 비어 있어 열을 잘 보존한다. 그래서 냉난방 조절에 탁월한 효과가 있다. 그외에도 냄새를 없애주는 탈취효과, 공기정화, 개미를 비롯한 해충이 접근하지 못하게 하는 효과가 있다.
세심원이 바로 그렇다. 고대에 사찰을 지을 때 간혹 연못을 메우고 그 위에 절을 지은 경우가 있었는데, 연못을 메우는 과정에 숯을 사용했다고 한다. 백제 무왕(武王) 시대에 지은 익산 미륵사지, 통일신라시대에 진표율사가 지은 김제 금산사의 미륵전, 전남 장흥의 보림사 터가 그런 경우다. 세 곳 모두 원래 물이 많은 늪지대나 연못이었는데, 대량의 숯을 투입하고 그 위에 건물을 지은 것이다.
필자는 이때 숯이 단순히 습기제거만 하는 줄 알았지, 이렇게 인간이 사는 데에 여러 가지로 쾌적한 효능을 선사하는 줄은 몰랐다. 숯이 깔린 방에서 잠을 자보고나서야 실감했다. 옛날 사람들은 숯이 지닌 놀라운 효능을 체험적으로 알고 있었던 것이다. 숯과 편백나무가 조화된 세심원은 피로 회복에 좋다. 서울에서 온 사람들은 세심원에서 지내는 동안 하루 3∼4시간만 자도 피로를 별로 느끼지 못한다고 한다.
-도시에 사는 사람들이 전원생활의 꿈을 실행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이라고 보나.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부부간에 의견이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남편이 아무리 원해도 부인이 반대하면 결국 전원으로 들어오지 못한다. 둘째는 직장을 그만두지 못하는 것이 걸림돌이 된다. 셋째는 처음부터 완벽한 집을 짓고 싶어하는 욕심 때문이다. 그림 같은 집은 돈도 많이 들고 시간도 많이 든다. |
결국 그림 같은 집을 꿈꾸는 사람은 십중팔구 전원생활을 실행하지 못한다. 처음에는 대충 시작해야 한다. 살면서 서서히 고쳐 나가는 게 합리적이다. 넷째는 아이들 교육문제다. 청소년기 자식을 둔 부부에겐 교육문제가 가장 큰 장애물이다. 시골에 들어오면 자식교육을 망친다고 생각한다. 다섯째는 저질러버리지 못하는 소심함 때문이다. 일단 저질러야 한다. 마음속으로만 몇 년 후에 오겠다고 다짐하면 결국에는 실행에 옮기지 못한다. 영원히 꿈만 꾸다 끝날 것이다. 아니면 죽은 후에 뼈만 돌아온다.
그런데도 전원생활을 꿈꾸는 사람의 숫자는 점점 증가하는 추세다. 5년 전이 다르고, 3년 전이 다르고, 올해가 되니까 또 다르다. 5년 전만 하더라도 시골에 들어와 살려는 사람들은 대개 정년퇴직한 고령층이거나 독특한 취향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양상이 달라졌다. 우선 연령대가 낮아지고 있다. 30대 초반중에도 전원에서 살고 싶어하는 사람이 더러 있다. 특별한 취미나 신념 없이도 시골에서 사는 삶도 괜찮다고 여기는 것 같다. 한국사람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삶의 가치가 변하고 있음을 실감한다. 특히 중년 남성의 경우 십중팔구는 도시를 떠나고 싶어한다. 그들은 삶에 지쳐 있다. 그에 대한 동경으로 전원으로의 회귀를 원하는 것 같다.”
혼자 있지 못하는 병
-30년간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나니 생활에 어떤 변화가 있는가.
“나는 산을 좋아했다. 산을 좋아하다 보니 자연에서 사는 삶을 평생 동경해왔다. 또 나무에 관심이 많았다. 좋은 나무를 보면 애정이 가고, 그런 나무를 가꾸고 싶었다. 나무에 대한 애정이 전원생활에 동기를 부여한 요소 중 하나다. 그 다음에는 숯에 관심이 갔다. 1998년 무렵에 내가 만든 각종 숯 공예품이 전국적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이러한 과정이 축적되면서 자연스럽게 직장을 그만둔 것이다. 직장을 그만둔 후 내게 일어난 작은 변화는 라디오를 듣지 않게 된 점이다. 직장에 다닐 때는 사무실에 늘 라디오를 켜놓았다. 그 다음엔 자연 풍광이 한 폭 그림으로 눈에 들어왔다. 안개가 산을 감싸는 광경, 저녁 무렵 해지는 풍경, 산에 비가 내리는 모습, 달이 뜨는 모습, 바람에 나부끼는 나뭇잎이 전부 한 폭의 산수화처럼 다가온다. 그전에는 이런 걸 봐도 별 감흥이 없었다. 이제 방외(方外)의 일사(逸士)가 되니까 마치 내가 시인이 된 것 같다. 세상을 보는 눈이 그만큼 넓어졌다는 이야기도 된다.”
-세심원을 관리하면서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을 관찰했을 듯한데….
“세심원에 머무는 도시 샐러리맨들을 가만 보면 대부분 혼자 있지를 못한다. 요즘 사람들은 홀로 있는 상태를 견디지 못한다. 혼자 있지 못하는 것은 큰 병인 것 같다. 혼자 있어야 세상을 볼 수 있다.”
청담이 직장을 그만두고 나서 스스로 다짐한 일이 있다. 규칙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를 궁리하다가 발견한 일이다. 그 일은 모두 3가지다. 첫째는 매일 세심원의 흙집 아궁이에 불을 때는 일이다. 매일 오후 6시경 장성읍내의 아파트에서 나와 세심원으로 향한다. 아궁이에 장작을 지피면 환하게 불꽃이 피어오르고, 그 불꽃을 바라보면 온갖 잡념이 사라진다고 한다. 마음이 안정되고 평화로워지는 것이다. 삶에 대한 의욕도 솟는다. ‘나도 저 불꽃처럼 훨훨 타는 인생을 살아봐야지’ 하고 스스로 다짐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새로운 꿈이 생기고, 생명이 연장되는 것 같은 기분이다. 어디 멀리 출타하는 날이면 후배에게 대신 불을 때달라고 부탁해둔다.
둘째는 보리를 열심히 키우는 일이다. 보리는 농약이 필요없다. 보리밭은 겨울에도 푸르다. 눈이 오면 다른 작물은 죽지만, 보리만큼은 혹독한 추위를 견디면서 사람을 반기는 것 같다. 이런 보리밭을 보면 마음이 편해진다. 청담은 식물의 성장과정을 보면서 사람의 마음이 열릴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언젠가 겨울에 보리밭을 지나다 시 한 수를 떠올렸다.
심을 때는 힘이 들어 잊었지요. 새싹을 보니 반갑네요. 모두 다 겨울잠을 자는데, 너는 살아 움직이는 구나. 너의 맑음, 너의 푸르름을 보니 내 마음의 고향을 찾았구나. 미안하다, 보리야! 왜 이제야 알았느냐! 자나 깨나 생각나는 자연의 소리. 보고 있으면서 그리워지는 생명의 소리. 보리야! 보리야! 반갑다! 내 마음의 고향
청담이 유념하는 세 번째 일은 차(茶)씨를 주변에 뿌리는 일이다. 차를 번식시키기 위해서다. 차는 정신을 맑게 하고 각종 성인병을 예방해주는 효과가 있다. 청담은 한국사람이 술보다 차를 더 많이 마셨으면 하는 바람으로 주위 산비탈에서 빈터를 발견하면 어김없이 차씨를 뿌린다. ‘내가 지금 씨를 뿌리면 후손들이 찻잎을 따서 먹을 게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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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초 직장을 그만두고 공무원 연금으로 생활하고 있지만 두 부부 사는 데는 부족함이 없다고 한다.
차에 관심을 가지면서 우리 조상들의 섭생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게 됐다. 조선후기 홍만선이 저술한 ‘산림경제(山林經濟)’가 이러한 의도에 딱 맞는 책이다. 우리 조상들의 섭생과 복거(卜居)에 대한 설명이 자세히 나와 있다. ‘산림경제’를 보면서 조상들이 먹던 전통식품에 주목해야 한다는 생각을 굳혔다. 섭생은 먹을거리에 크게 좌우되기 때문이다. 청담은 ‘산림경제’가 좋아서 이 책의 번역본을 대량으로 구입해 주변사람들에게 무료로 나눠주기도 했다. 필자도 한 권 선물로 받았다.
‘덕을 쌓고 살아라’
청담 변동해는 외관상 특별한 요소가 전혀 없는 사람이다. 지극히 평범하다. 농고를 졸업한 뒤 군청의 민원팀장(계장)으로 일한 경력이 있고, 장성 읍내의 25평짜리 아파트에 살며 1300cc 승용차를 갖고 있다. 겨우 밥 먹고 사는 사람이다. 이처럼 범범(凡凡)한 제원(諸元)을 가진 사람이 다른 사람들과 나누는 인생을 살고 싶어한다. 누가 강요한 것도 아니다. 필자는 청담과 대화를 나누면서 줄곧 그 마음이 어디에서 왔을지 궁금했다. 청담에게 물어봤다. “변씨 집안의 조상들이 지녔던 정신을 계승하고 싶었다”는 대답이 돌아온다.
그는 어릴 적 기억을 떠올렸다. 길손이 집에 찾아오면 손자, 손녀에게는 찬밥을 주더라도 길손에게는 따뜻한 밥을 내주던 할머니. 그때는 할머니의 마음을 헤아릴 수 없었다. 40대 중반이 넘어가면서 비로소 그때 할머니가 왜 그랬는가를 이해하게 되었다고 한다. ‘덕을 쌓고 살아라’가 그의 집 가훈이다.
장성에 입향한 황주(黃州) 변씨(邊氏) 집안의 중시조를 거슬러 올라가면 망암(望菴) 변이중(邊以中·1546∼1611)이 나온다. 변이중은 발명가였다. 임진왜란때에 화차(火車)를 발명한 인물이다. 화차는 수레 위에 총을 수십 자루 장착해 이동하기 쉽고, 한 번에 여러 발의 총을 쏠 수 있게 한 무기다. 권율 장군이 행주산성 싸움에서 적을 무찌를 수 있었던 배경에는 변이중이 만든 뛰어난 성능의 화차가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변이중은 당파싸움에 휘말려 제대로 된 대접을 받지 못했다. 청담은 망암 변이중의 12대 손이다.
청담의 증조부 변승기(邊昇基)는 대한매일신보 주간을 지냈다. 낙향해 위정척사 운동을 했으며 신학문에 관심을 갖고 호남학회를 창립하기도 했다. 변승기는 일제 강점기 때 전국적으로 벌어진 ‘균세(均稅) 운동’을 시작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일제의 엽전수탈이라는 경제침략에 대항하기 위해 벌인 운동이다. 이로 인해 농민의 세 부담이 경감됐다.
청담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 인물은 조부인 변진갑(邊鎭甲)이다. 그는 광복 이후 2∼4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국회 농림분과위원장을 지내면서 ‘대한잠사회’를 창립했다. 별다른 수출품이 없던 1950년대에 잠사(蠶絲)는 중요한 수출 품목이었다. 잠사 농가를 보호하기 위해 ‘잠사법’을 만들었는데, 이 과정에서 ‘잠사법’을 보류해달라는 로비를 받았다고 한다. 잠사수출업자가 법안 처리를 1년만 늦춰주는 조건으로 당시 30억원이라는 거액을 제시했다고 한다. 그러나 변진갑은 이를 단박에 거절했다. 청담은 이 일화를 지금도 아주 자랑스럽게 여긴다.
사회에 갚아야 할 빚
변진갑은 은퇴 후 고향 장성으로 내려와 노인들에게 지팡이(죽장)를 만들어 선사하는 일을 했다. 국회의원으로 만들어준 주민에게 미력이나마 보은을 해야 한다는 뜻에서 시작한 일이다. 청담은 어릴 적 할아버지가 죽장을 만들어 노인들에게 나눠주는 것을 보며 자랐다. 하지만 청담의 집안엔 돈이 없었다. 국회의원의 손자였지만 경제적으로는 풍족하지 못했다. 집에 쌀이 없어서 옆집에 보리를 꾸러 간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집에 돈이 없다 보니 변진갑의 손자 17명 중 대학을 나온 사람은 2명뿐이다. 나머지는 먹고 살 방도를 찾기 위해 농업고등학교까지만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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趙龍憲 ● 1961년 전남 순천 출생 ● 원광대 대학원 불교민속학 전공, 철학박사 ● 한·중·일 삼국의 600여 개 사찰과 암자를 현장 답사 ● 원광대 초빙교수 ● 저서 : ‘나는 산으로 간다’ ‘500년 내력의 명문가 이야기’ ‘조용헌의 사주명리학 이야기’ ‘방외지사’ | |
그는 사회에 빚진 것이 하나 있다. 중학생 시절 안평역에서 광주까지 기차로 통학하면서 2년간 무임승차한 일이다. 한 달 차비가 445원이었는데, 그때는 그 돈이 무척 커 보였다. 그 돈을 아끼면 살림에 보탬이 될 거라는 생각에 2년씩이나 몰래 기차를 탔다. 청담은 “쉰 살이 넘고 보니 35년 전에 도둑기차를 타면서 내지 않은 차비가 생각나더라”며 “앞으로 갚아야 할 빚으로 생각하고 있다”고 했다. (끝) |
고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