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쪽지방의 산에서는 노각나무를 흔히 볼 수 있다. 노각나무는 차나무과에 딸린 중간키나무로 세속을 초월한 도인의
품위가 있는 나무이다. 잎은 시원스럽게 널찍하고 여름철에 좋은 향기가 나는 큼직한 흰 꽃이 핀다. 배롱나무나 모과나무를 닮은 껍질이 아름다워서
요즈음 정원수로도 인기가 있고 나뭇결이 아름답고 빛깔이 고와서 가구나 그릇을 만드는 사람들이 가장 귀하게 여긴다. 나의 아버지는 일생을
목기만 깍다가 돌아가셨는데 목기 재료로 가장 훌륭한 나무가 바로 노각나무였다. 노각나무로 바둑알통이나 밥그릇, 제기 등을 깎아 놓으면 푸른
빛깔이 도는 무늬가 썩 보기에도 좋을 뿐 아니라 결이 부드럽고 갈라지지 않아서 최고급품으로 쳐 주었다. 옛날에는 지리산일대에 한 아름씩이나 되는
큰 노각나무들이 많았는데 목기장이들이 다 베어버린 까닭에 지금은 큰 나무를 보기 어렵게 되었다. 노각나무는 전체적인 모양새가
품위가 있고 향기 좋고 큼직한 꽃이 피며 껍질의 무늬가 아름답고 나무 전체에서 시원한 향기가 나는 까닭에 산중의 미인으로 꼽을만한 나무다.
그러나 이 아름다운 나무에 신비로운 약성이 감추어져 있는 것을 아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어떤 본초학 책에도 적혀 있지 않지만 노각나무는
간염이나 간경화증, 지방간 같은 여러 종류의 간질환과 손발마비, 관절염 등에 뛰어난 치료효과가 있는 약나무다. 어혈을 풀어주는 효과도 탁월하고
농약중독, 중금속 중독을 풀어주는 작용도 뛰어나다. 산에서 넘어져 발을 삐었거나 다쳤을 때 노각나무 껍질을 짓찧어 붙인 다음 노각나무 껍질이나
잔가지를 달여서 먹으면 오래 지나지 않아 통증이 없어지고 부은 것이 내린다. 노각나무 잎은 술독을 푸는 효과도 있다. 잎을 말려서 가루
내어 먹거나 날 것을 달여서 한 잔 마시면 술을 많이 마셔도 잘 취하지 않고 술에 취한 사람도 얼마 안가서 깨어난다. 평소에 술을 많이 마시는
사람은 노각나무 잎을 말려서 가루 내어 몸에 지니고 다니면서 술 마시기 전에 3-5그램씩 먹으면 술로 인해 몸이 망가지는 것을 막을 수
있다. 내가 어렸을 적에 경북 금릉군 수도산에 약초를 캐는 할아버지가 계셨는데 그 분은 노각나무를 위주로 하고
인동덩굴, 오갈피, 만삼, 옻나무, 마가목 같은 몇 가지 약초를 보태어 달여서 황달이나 간경화증, 위장병, 신경통 등 어지간한 병이면 말끔하게
고치곤 하셨다. 그 분은 늘 노각나무를 달인 물을 병에 담아 갖고 다니면서 음료수처럼 마시곤 하셨는데, 그것을 마시면 뼈가 튼튼해져서 높은
곳에서 떨어져도 뼈를 다치지 않고 술을 마셔도 취하지 않으며 상한 음식을 먹어도 탈이 나는 법이 없다고 하셨다. 노각나무의 효력 때문이었는지 그
분은 과연 백 살이 넘도록 건강하게 사시다가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다.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 나는 노각나무를 달여서 먹어 보았다.
달짝지근한 맛과 특이한 향기가 있어 먹기가 괜찮았다. 노각나무는 고로쇠나무나 박달나무, 거제수나무처럼 수액을 받아 마실 수 있다. 이른 봄철 잎
트기 전에 나뭇가지를 꺾거나 나무에 상처를 내면 달콤한 맛이 나는 수액이 줄줄 흘러내린다. 오래 전에 지리산 한신 계곡에서 사진을
찍으려고 크게 자란 노각나무에 올라갔다가 실수로 작은 가지 하나를 꺾었더니 수액이 마치 폭포처럼 흘러내리는 바람에 나뭇가지에 입을 대고 정신없이
받아먹었던 기억이 난다. 수액을 그릇에 받아서 마시면 여러 간질환과 위장병, 신경통, 관절염 등에 좋은 효험이 있다. 노각나무는 고로쇠나무나
거제수나무보다 수액이 훨씬 많이 나오고 맛도 좋다. 그런데도 이 나무의 수액을 받아 마시는 풍습이 없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노각나무는
우리나라 특산식물이다. 특산식물이란 우리나라 말고는 세계 어떤 나라에도 자라지 않는 식물이란 뜻이다. 잘 활용하면 약용 뿐 아니라 관상용으로도
세계적인 나무가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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