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

구필화가 김성애님

지리산자연인 2006. 2. 9. 15:04

<아랫글은 구필화가 김성애님의 모 월간지에 기재된 글 원본입니다.>

<입에 막대기를 물고 하나하나 눌러서 친 타자라 오타도 있고 받힘이나 문장구성에 부적함이 있어도 양해를 바랍니다>

 

과학은 달나라까지 가고 의학은 복제인간도 만들어 내고 안방에 뉘어 전 세계를 다 볼 수 있는 세상인데 관절염하나 못 고쳐 이 지경이 되도록 내 버려두었느냐고 핀잔 반 안타까움 반으로 질문하는 사람들이 많다. 나는 처음엔 이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이런 몰골로 산다는 것이 수치라고 생각해 밥을 맛이게 먹다가도 아차 하고 수저를 놓아 버리기 일쑤고 하하하고 웃다가도 웃음을 뚝 그치고 억지로 우거지상을 지어 주위를 살벌하게 만들었다. 이런 몰골로 산다는 것은 내 자존심도 허락지 않았지만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린 시점에서 살아야 할 이유가 없었다. 나에게는 1%의 희망도 없었다. 어떻게 죽을까  죽은 방법만이 유일한 희망이었다.  하지만 지금 입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면서 그 구구하고 구차한 변명을 하지 않고 내가 살아야 할 이유를 자신 있게 말한다. 하나님이 나의 교만을 아시고 입으로 이 세상을 그리라고 나를 이렇게 만드셨다고... 

 신혼의 단꿈에서 깨어나지도 않았는데 나의 육신은 만신창이 되어 들것에 실려 결혼 일년만에 친정으로 돌아 왔다. 너무나 격심한 통증 때문에 아무생각이 없었다. 뼈를 깎아 내는 듯한 통증만 없으면 백년을 뉘어 있어도 원망하지 않겠다고 통증만 없애 달라고 애원을 했다. 진통제 부작용으로 더 이상 진통제도 복용할 수가 없었고 위가 다 헐어서 병원에서도 약을 주지 않았다. 격심한 통증을 없앨 방법은 죽음밖에 없었다. 차라리 나를 죽게 해 달라고 그것이 나를 위한 길이라고 어머니께 간청을 했지만 어머니는 도리어 내 병을 고쳐 보겠다고 백방으로 뛰어 다시며 관절염에 좋다는 민간요법이건 한약이건 모조리 구해 먹였다. 어머니 정성 덕분인지 통증이 차츰 가시는 기미가 보일 때 시간은 일년이 훌쩍 지난 뒤였다.   통증이 남기고 간 후유증은 참으로 엄청났다. 통증 만 없으면 백년을 뉘어 있어도 원망하지 않겠다는 맹세가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지 그것을 깨달았을 때 나의 사지는  제멋대로 변형되어 굳어져 제 기능을 상실한 채 흉물스러운 철 구조물에 불과 했고, 내가 설계하고 꿈꾸었든 결혼 생활도 산산조각이 나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어머니는 서른에 조롱박 같은 자식 일곱을 둔 가장이셨다. 나는 어머니의 약한 모습을 한번도 본적이 없었다. 한 끼 때우기도 벅찬 가난한 살림에서도 어머니의 든든한 버팀목은 자식들이라고 늘 말씀하셨다. 내 나이 서른? 사방을 둘러봐도 내가 기대고 의지할 곳은 아무것도 없었다. 병든 몸과 절망뿐인 내가 살아간다는 것은 상상도 하기 싫었다. 죽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행동은 다 취해 봤지만 죽지 못하고 아무 의욕도 생각도 없이 8년이란 세월을 보냈었다.

 고통과 절망 속에서도 유일한 버팀목이 되시든 어머니마저 하늘나라로 가셨다. 이젠 내가 정말로 가야할 곳은 단 한곳, 죽음밖에 없었다. 어떤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해서라도 실행에 옮길 수밖에 없었다. 냉대와 무관심 자신의 무기력과 외로움을 더 이상 버딜 여력도 없었지만 무엇보다도 대화할 상대가 없다는 것과 불투명한 미래가  뼈를 깎는 통증보다 더 견디기 힘든 형벌이었다. 하지만 몇 번의 자살이 미수에 그치자 죽음이란 공포가 두려워서 더 이상 자살을 시도할 수가 없었다. 살기는 살아야 되는데 어떻게 살 것인가? 그것이 문제였다. 가족 모두가 원하는 것 - 그저 주는 밥이나 잘 먹고 말썽부리지 말고 짐승처럼 편안히 살다가 가는 길을 택하든지 아니면 세상 밖으로 나가  내 스스로 선택한길에 운명을 한번 맡겨보는 것, 이 두 가지 생각을 두고 고심하다가  살든지 죽든지 바깥세상으로 한번 나가 보기로 결심했다.

 

집안에 아무도 없는 시간을 틈타 3층 계단을 기어 내려와 내가 가야할 길이 어딘지 뚜렷한 목적도 없이 10년간 두문불출한  세상으로 탈출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나를 반겨주고 어려운 결심을 환영해 주는 곳은 아무데도 없었다. 예상 못한 것은 아니지만 역시 나의 선택은 죽음밖에 없다는 것을 실감하면서 건강할 때 활개를 치며 다니든 거리 사랑하는 사람들과  꿈을 꾸며 다니든 거리, 내 삶의 터전이고,  꿈의 궁전이었든 서울의 거리에서- 어릴 적부터 병마와 가난과 싸우면서도 좌절과 실망 같은 것은  내 사전에 존재하지도 않았는데-결국 병마로 만신창이 된 육신을 이끌고 내 40의 생을 마감하다니.....후회도 미련도 없었다. 나는 눈을 감고 휄체어 브레이크를 차도를 향해 잡아 당겼다. 차도로 미끄러지는 훨체어를 잡은 손길이 너무 원망스러워 고함을 쳐봤지만 소용이 없었다. 죽음마저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내가 어떻게 할 것인가? 그 사람의 손에 이끌려 중증 장애아들만 수용하는 재활원으로 아무데도 쓸모없는  물건처럼 인도되었다. 하지만 그 비참한 곳에 수용되어 있는 장애아들을 보면서  내가 하고 있는 고민과 갈등이  얼마나 호사스러운 사치를 하고 있는 것 같아 그 아이들 보기가  정말 부끄러웠다. 물 한 모금도 잘 넘길 수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것인지 깨닫지 못한  40의 불쌍한 나의 인생을 미련 없이 그 자리에 던 져 버리고 새로운 희망과 꿈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왔다.        

  죽음을 각오했을 땐 아무것도 필요치 않았지만 산다는 것은 많은 것을 요구하고 결단과 선택이 있어야 했다. 남들은 중학교에 갈 나이에 문맹에서 벗어나기 위해 무작정 초등학교 4학년 교실로 뛰어 들어 배움의 길을 내 스스로 열어 고등학교까지 졸업하고 사회에서 대우를 받으면서 활동할 때처럼 - 그저 좋은 사람 만나서 결혼 해  평범하게 사는 것이 여자의 행복이라고 생각한 사고방식부터 버려야 했다- 인생 40이면 불혹이라 하지만 나의 40은 인생 시작이라 생각하고 꿈이고 늘 하고 싶었지만 가정 형편으로 이루지 못한  그림을 그리며 내 인생을 다시 설계하자는 생각이 들었다.

 집으로 돌아와 제일 먼저 한 일이 가족들로부터 독립을 하는 것이었다. 사람한테 의지한다는 것은 나 자신에게 남은 것은 절망과 상실뿐이라는 것을 깨닫게 한 하나님을 나의 호주로 삼고  가족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내가 살기 위해서 독립을 강행했다. 그리고 내게 남아 있는 것이 무엇인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점검을 해봤다. 재산은 무일푼에  나의 신체 중 가장 양호한 곳은 입, 그것도  관절염이 턱 관절까지 침범 해 입을 짝 벌리지도, 통증 때문에 음식도 제대로 씹지 못한 입( 조동아리 우리 어머니 표현)뿐이었다. 누가 밥을 쥐어도 내 손으로 떠먹지도 못한 주제에 혼자 살아 보겠다고 결심하고 다짐하고 용기를 가지고 독립해 나오기는 나왔지만 막상 혼자되니까 무섭고 두려워서 모든 것을 포기 해버리고 싶기도 했고, 무엇보다도 막막한 것은 그림을 그리는 것이었다. 그림을 좋아해서 늘 하고는 싶었지만 그림의 기초도 배우지 못한 처지로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무모한 도전이란 것을 뼈저리게 느끼기도 했다. 가족들에게 그림을 그리며 씩씩하게 살겠다고 큰소리 치고 나왔는데 여기서 포기 해버리며 ‘그래 잘 생각했다. 그런 몸으로 뭘 하겠다고..’하고 비웃을 당하는 것도 싫었지만 또다시 죽음을 생각하기가 싫어 포기할 수 없었다.

 한달 생활비 5만원이 드는데 5만원 학원비를 내면서 그림공부를 시작했다. 늦게 배운 도둑질  날 샌 줄 모른다고 너무 열심히 하다보니 건강이 더 악화되어 더 이상 붓을 잡고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무리였다. 건강이 회복되길 기다렸지만 좋아지기는커녕 혼자서는 생활할 수 없는 지경까지 되어  버렸다. 여태까지 형제들의 도움으로 근근이 살아왔는데 봉사자의 월급까지 지불할 생각을 하니 눈앞이 캄캄했다. 24시간 남의 손길이 필요한데 돈이 없어 3시간짜리 파출부를 쓰니 하루 일과를 3시간 안에 다 해야 하니 끼니를 거르는 것은 다반사

 

고 그 답답하고 힘든 과정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다. 형제들은 다시 집으로 들어오라고 하지만 나의 목적을 이룰 때까지는 들어갈 수 없다고 단호히 거절했다.

 아무리 어렵고 힘들어도 새롭게 시작한 나의 생을 하루 종일 침대에 누워 허송세월을 보낼 순 없었다. 손이 안 되면 입으로라도 그림을 그려보자는 결심을 하고 평소 알고 지내는  목사님께 의논 드렸더니 목사님이 미대 4학년에 다니는 학생을 소개해 주셨다. 과외비는커녕 교통비도 주지 못했지만 그림 선생님은 일주일에 한번씩 와 열과 성의를 다해 그림에 불모지나 다름없는 나를  지도를 해 주셨다.

 입으로 그림을 그린다는 것이 생각보다 만만치가 않다는 것을 예상했지만 너무 힘들어 하루에도 몇 번이나 포기하고 싶은 마음을 달래면서 주위에 격려와 많은 사람들의 도움으로 좌절의 한계를 극복하고 입으로 그림을 시작한지 2년 만에 96년 세계구족화가 협회에 학생회원으로 가입되었다. 그때 내 나이가 48세었다. 불혹의 나이에 시작한 그림이지만 화가로 공식적인 인증을 받고 시작한 나의 그림은 나날이 발전하고 있었다. 

 어릴 적에 2000년이 되면 나는 무엇을 하고 어떤 사람이 되어 있을까? 늘 궁금해 하며 살아 왔었다. 2000년... !! 내가 그토록 궁금해 하든 2천년 어느 봄 날 인사동 어느 화랑에서 입으로 그린 그림을 전시회를 하고 있었다. 예전에 한 미모하든 모습은 온데간데없지만  붓을 물고 그림을 그리는 자화상을 바라보니  홀로 서기에 힘겨웠든 서러움이 한 순간에 사라지고 나의 모습이 얼마나 대견스럽고 아름다운지 일주일 내내  보고 또 보며 전시회를 성황리 끝마쳤다. 

 붓을 입에 물고 그림을 그리고 컴퓨터 하는 모습을 바라보든 이웃집 꼬마가 아줌마는 무슨 묘기를 하고 있느냐고 물어 왔다. 무슨 묘기? 순간 나도 몰래 꼬마를 째려 봤더니 아이는 엄마 품으로 가 아줌마가 무섭다고 울음을 터뜨렸다. 아이 엄마는 입으로 그림을 그리는 이유를 설명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아이는 그림은 손으로 그려야 한다고 우겨 됐다. 무슨 일이든 원칙을 지켜야 정상적인 대우를 받은 세상에서 비 원칙적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일이 얼마나 힘든 과정이란 것을 그 아이가 어떻게 알겠는가? 나는 아이에게 흘겨든 눈을 곱게 뜨며 ‘ 얘야, 그림은 말이야. 손도 입도 아닌 마음으로 그린단다.’ 하고 살며시 말했다.

  세상 모든 일이 그렇겠지만 특히 예술분야에서는 소질이 없는 사람이 예술을 택한다는 것은 시간 낭비고 가장 어리석은 선택이라고 하고 또 40안에 자기가 하는 분야에 확실한 개성을 구축 해 놓아야 성공할 수 있다고 하지만 나는 아직 나의 빛깔과 개성을 찾지 못했고 나의 그림 실력이 상 중 하 어느 곳에 속하는지 알지 못한다. 하지만 포기는 하지 않을 것이다. 손과 발 온 몸으로 만들어 왔던 나의 인생은 실패로 끝났지만 입 하나로 다시 시작한 인생,  그림뿐만 아니라 나의 생활 모든 것, 나만의 세계가 아니라 모두가 함께 하는 세상을 입에 붓을 물 수 있는 날까지 아름답게 후회 없이 잃어버리고 소홀히 여겼든 인간관계와 이루지 못한 사랑까지 모든 것을 다시 만들어 결코 후회 없는 생을 마치기 위해 최선을 다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