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성봉 논골
횡천에서 청암을 거쳐 청학동 쪽으로 가다가 하동호(청암호) 언저리에서 서쪽 샛길로 빠지면 분주히 오가던 차량 물결은 어느새 사라지고 이내 고즈넉한 분위기로 바뀐다. 예전 우마차나 다니던 길이 좁은 아스팔트와 시멘트로 포장되어 옛 정취가 반감된 아쉬움은 있으나 여전히 운치 있는 길이다. 옆으로는 칠성봉에서 발원한 맑은 계곡이 따라와 청량감을 더한다. 작은 폭포와 깊은 못이 연이어 있어 한여름이면 피서객이 종종 찾아드는 계곡이다. 칠성봉산장 앞 계곡
칠성봉산장을 지나면서 분위기는 다시금 크게 돌변한다. 좁다란 시멘트 길이 굽이굽이 돌며 가파르게 기어오른다. 길이 있으니 갈 뿐, 과연 사람이 살고 있을지 의구심이 들 정도로 깊은 산 속으로 올라가는 것이다. 오가는 사람을 만난다면 오히려 행운이리라. 어릴 적 무척이나 좋아하던 강소천 님의 동요 '흰 구름 푸른 구름'이 불현듯 떠오른다. 마음이 갑갑할 땐 언덕에 올라 콧노래 흥얼거리며 30분 남짓 가풀막을 오르면 남쪽으로 칠성봉(910m)이 웅장한 자태로 우뚝 솟아 있다. 잘 빠진 장송들이 늘어선 고갯마루에 서자 아늑한 마을이 내려다보인다. 마을 뒤쪽 산등성이에는 커다란 당나무 몇 그루가 장승이나 솟대인 양 묵묵히 서서 나그네를 맞는다. 사방으로 높은 산들이 에워싼 가운데 바깥 세상에 자신들의 모습을 철저히 노출시키지 않으려는 듯 잔뜩 웅크리고 있는 이 마을이 바로 논골이다.
지리산 남쪽 기슭에 '3은 3점'의 피난처가 있다는 기록이 나온다. 3은동은 고은동(고운동), 노은동(논골), 심은동이며 3점리는 풍점리, 먹점리, 미점리를 가리킨다. 3은동의 하나인 논골은 한국전쟁과 지리산 빨치산 사건 때에도 다친 사람이 하나도 없어서 천혜의 피난처라는 이름 값을 톡톡히 했다. 경작할 땅이 20만 평이 넘는 평평한 분지 마을이다. 이곳에 마을이 형성된 것은 넓은 경작지 외에 물이 풍부한 덕분이다. 칠성봉 자락에서 흘러내린 계류는 웬만한 가뭄에도 마르는 법이 없을 만큼 옥수가 철철 넘친다. 이처럼 먹고살기에 부족함이 없는 기름진 농토 덕분에 산간벽지인데도 우리나라 농촌의 전형적인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삼신봉에 이르러 남쪽 산기슭의 청학동과 묵계리를 감싸안고 좌청룡 우백호의 두 줄기로 갈린다. 동남으로 뻗은 우백호는 주산과 옥산을 거쳐 마산 쪽으로 이어지는 낙남정맥 본줄기이고, 남으로 뻗은 좌청룡은 시루봉을 거쳐 논골 뒷산인 깃대봉에 이른다. 깃대봉에서 남쪽으로 칠성봉에 이르는 20여 리의 힘차고 높은 산줄기는 논골에서 악양으로 넘는 길목을 가로막는 천연 장벽 구실을 한다. 옛 논골 사람들은 가까운 악양을 생활권으로 삼았다. 그래서 장 나들이를 할 때는 이 천연 장벽 가운데로 난 배티재를 통해 왕복 대여섯 시간이나 걸어 악양장을 이용했다. 논골 고갯마루 3거리에서 서쪽으로 가는 악양 옛길이 아직 남아 있어 옛 사람들의 발자취를 더듬게 한다. 산제밭골, 잔치평전, 웃장구목, 아랫장구목 등의 이름을 갖고 있다. 또한 당나무가 서 있는 언덕배기를 기준으로 북쪽을 음달땅, 남쪽을 양달땅이라 하며 동구 쪽 공터는 진틀배기라고 불렀다. 1960년대만 해도 두레 문화가 뿌리깊게 남아 품앗이로 모 심고 농사짓고 추수 잔치를 벌였다는 곳. 그러나 1970년대 초 새마을운동이 시작되면서 이 마을에도 큰 변화가 몰아닥쳤다. 새마을운동의 기본 시책인 지붕 개량을 하려니 힘에 부칠 수밖에 없었다. 주민들은 늘어나는 빚더미에 등이 휘어 하나둘 마을을 떠났다. 50호가 넘던 가구는 이제 10여 호밖에 남지 않았고 그나마 젊은이들은 찾아볼 수 없다. 자식들은 모두 대처로 떠나고 노인들만 남아 땅을 부치는 처지가 된 것이다. 마을 당나무나 안골 소나무의 수령으로 미루어보건대 역사가 최소한 300년은 넘은 듯한 이 마을의 운명도 다른 오지 마을과 별반 다르지 않을 것 같아 안타깝기만 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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