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만하면 족하지 뭘 더 바래” 좁 고 깊숙한 사무곡(士茂谷)의 초입에 이르니 도무지 사람이 살 만한 골짜기로는 여겨지지 않았다(「사무곡」은 강원도 삼척시 신기면 대평리의 「우체부도 들어오지 않는」 마을이다). 곡벽(谷壁)은 벼루처럼 가파르고, 물길이 지나는 골짜기 바닥은 한달음에 건너뛸 수 있을 정도로 폭이 좁았다. 비좁은 골짜기에선 마을이나 농토는커녕 초가 한채도 들어앉기 어려울 성싶었다. 몇사람에게 물어 찾아온 길인데도 몇번이나 「길을 잘못 들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길은 골짜기 안쪽 깊숙한 곳까지 뚜 렷하게 이어졌다. 깊숙dl 들어갈수록 골짜기 는 오히려 더 넓어지고 이따금 물가의 펀펀 한 둔덕에는 사람살았던 흔적도 간간이 눈에 띄었다. 틀림없는 집터인데도 대부분 억새와 잡목들이 빽빽하게 들어차 여느 덤불과 잘 분간이 되지 않았다. 반쯤 무너져내린 돌담 과 축대, 그리고 때깔 좋은 홍시가 매달린 감나무만 아니라면 옛 화전민의 자취임을 짐 작하기도 어려울 만큼…. 그래도 흉물스럽게 방치된 폐가는 한채도 없다는 게 다행스러웠 다. 여태껏 사무곡에 남은 집은 모두 세채. 사람 사는 두집 중 정상홍씨(68)의 굴핏집은 훤하 게 트인 산중턱에 자리잡고 있다. 집터가 워 낙 높기도 하거니와 주위에 넓은 밭들이 둘 러져 있어 시야가 아주 산뜻하다. 울 밖으로 몇걸음만 나서면 굽이굽이 흘러내린 골짜기 며 물결치듯 오르내리는 산자락이 한눈에 들 어온다. 더욱이 능선가까이에 동향으로 들어 앉은 첩첩산중의 집터치고는 일조량도 풍부 하다. 바깥세상으로 드나는 길이 조금 멀고 험한 것 말고는 누대로 뿌리를 내리고 살 만 한 조건들이 제대로 갖춰진 집이었다. 정씨의 굴핏집은 정면 세칸, 측면 두칸 규모 의 전형적인 겹집이다. 각기 한칸쯤 되는 네 개의 방이 왼쪽에 몰려 있고, 오른쪽에는 외 양간과 작은 허드렛방이 딸린 부엌이 있다. 그리고 맨 오른쪽의 달개(처마 끝에 늘여 지 은 허술한 칸)에는 측간과 디딜방앗간이 들 어앉았다. 기본적으로는 북방식의 폐쇄적인 가옥형태를 갖췄으면서도 지붕에 까치구멍 (용마루 양끝의 바로 아래쪽에 까치가 드나 들만한 크기로 만들어놓은 환기 구멍)을 두 지 않았고, 방이 몰려 있는 왼쪽에 높은 토 방과 긴 툇마루를 설치했다. 나름대로 남방 식의 개방적인 가옥형태를 일부 반영한 것 같았다.
흙과 나무로만 지은 집은 대체로 주인이 조 금만 무심해도 금세 허름해지게 마련이다. 특히 굴핏집은 지붕에 올려진 굴피가 썩으면 빗물이 새고 보온력이 떨어지기 때문에 적어 도 5년에 한번쯤 새로 올려야 한다. 그러나 정씨가 사는 굴핏집은 안팎이 두루 단정하고 튼실해 보일 뿐더러 주인의 정성과 손길이 구석구석마다 스며 있었다. 마루 토방 마당 과 방안의 대자리(竹席)는 방금 비질이나 걸 레질을 한 것처럼 깨끗했고, 집 주변에 둘러 쳐진 바자울도 가지런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돋보이는 것은 역시 굴피지 붕이었다. 아래쪽부터 두겹씩 엇갈리게 해서 굴피를 덮었는데, 비 한방울도 샐 수 없을 만큼 간격이 일정하고 촘촘했다. 이처럼 멀 쩡한 지붕인데도 마당 한켠에는 갓 벗겨낸 듯한 굴피가 층층이 쌓여 있다. 정씨는 『올 가을에 새로 굴피를 올리려고 벗겨다 놓은 것인데, 일손을 못구해 그냥 쌓아 두고만 있 다』고 말했다. 이 굴핏집은 정씨가 서른살쯤 됐을 무렵에 손수 지은 것이라고 한다. 얼추 40년 가까이 된 셈이다. 그 전에는 골짜기 안쪽으로 5리 쯤 더 떨어진 옛집에서 나고 자랐다. 그러나 옛집에 대한 추억은 별로 남아 있는 게 없 다. 「친구도 없고 글방에도 한번 못가본 채 오직 일만 하면서」 살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장가가고 군대갈 때까지 삼척 읍내에도 나가 본 적이 없었고, 까막눈이 신세도 군대에 들 어가서야 간신히 면할 수 있었다. 제대하고 돌아오자 부친은 그동안 모은 돈으로 땅과 집터를 장만해서 이사를 하기로 했다. 정씨 는 내심 골짜기 아래 큰 마을로 나가기를 기 대했지만 결국 이 골짜기를 못벗어났다. 이 골짜기에는 화전정리사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만 해도 서른가구 남짓 화전민들 이 모여 살았고, 10년 전까지는 울타리를 맞 댄 이웃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정씨와 골 짜기 아래쪽에 사는 이씨네만 남았다. 정씨 는 스물두살 때 노곡면에 사는 세살 연하의 처녀와 혼인해 2남2녀를 뒀으나 지금은 자식 들 모두 가정을 꾸려 독립했다. 부인도 삼척 시내에서 큰아들네와 함께 살며 과일 노점을 하고 있기 때문에 집에는 정씨 혼자만 남았 다. 이웃 하나없이 가족과 떨어져 사는 게 외롭고 쓸쓸하긴 하지만, 산중에서의 외로움 보다는 도시생활의 무료함을 더 견디기 어렵 다고 했다. 『자식들은 혼자 있지 말고 그만 오라고들 하 지만 여길 떠나 도시로 가면 할 일이 없어 요. 기껏해야 노인정에나 다니면서 헛돈만 쓰게 되지. 그러니 답답해서 하루도 지내기 힘들어. 고맙게도 아직은 몸도 건강해서 일 할 수 있고 또 자식들한테 짐되기도 싫고…』 그의 하루하루는 어찌나 분주한지 외로움 따 위는 미처 느낄 겨를도 없어보였다. 일과는 새벽 다섯시부터 시작되는데, 해가 길거나 짧거나 늘 한결같다고 한다. 잠자리에서 일 어나자마자 방과 마당을 청소한 뒤 간단하게 아침식사를 한다. 밥상을 물리고 나면 이틀 에 한번씩은 20ℓ짜리 물통 두개를 지고 샘 터에 가서 물을 길어와야 한다. 아무리 이력 이 난 일이더라도, 왕복 20분 거리의 샘터에 서 40㎏짜리 물통을 짊어지고 오는 일이 만 만해 보이지 않았다. 이런저런 집안일에 열 중하다 보면 해가 산등성이 위로 솟아오른 뒤에야 밭일을 시작한다. 정씨 소유의 밭은 7000평 가량 되지만 이미 오래 전 대부분 묵밭으로 변했다. 그 까닭을 그는 『일손도 없고 쟁기질 할 소도 없는 처 지에 그 많은 밭을 도저히 일굴 수가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더욱이 찻길조차 없어 무 배추 감자같은 무거운 채소는 대규모로 경작 할 수도 없다. 내다 팔 것으로는 주로 콩 깨 마늘 옥수수 고추 등과 같이 비교적 가벼운 작물을 심고, 파 상추 배추 무 등은 자급자 족할 만큼만 심는다. 그래서 밭일은 별로 많 지도 않고 별 이득도 없다고 한다.
정씨의 주된 수입원은 산일이다. 봄부터 늦 가을까지 산자락과 골짜기를 오르내리며 두 릅과 초피 열매를 따거나 더덕과 황기를 캔 다. 그리고 머루같은 산열매를 따서 부인의 과일 노점을 통해 팔기도 하는데, 올해에는 머루만으로도 30만원을 벌었다고 했다. 겨울 의 문턱에 들어선 요즈음에도 정씨는 여전히 할 일이 많다. 밭이 얼어붙기 전에 마늘종자 도 심어야 하고, 밤에는 침침한 호롱불 아래 에서 곶감 만들 감도 깎아야 하기 때문이다. 딱히 할 일이 없을 때에는 산죽이나 싸리나 무로 삼태기 소쿠리 바구니 등 생활용품들을 엮기도 한다. 정씨의 이런 삶을 세세히 들여다보고 있으니 문득 「아직도 영락없는 화전민이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비록 화전을 경작하지는 않 지만, 자연에 의지하는 정씨의 삶은 화전을 일구던 그 시절과 전혀 다르지 않을 듯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변함없는 것은 대자연의 섭 리에 순응하며 안분지족하는 순박한 심성과 따뜻한 마음이었다. 그의 굴핏집이 유난히 아늑하고 아름답게 느껴지는 까닭도 그 때문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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