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지

[스크랩] 삼척 사무곡의 화전민 정상홍씨

지리산자연인 2006. 2. 1. 16:43
자연에 순응하며 安分知足
“이만하면 족하지 뭘 더 바래”


  좁 고 깊숙한 사무곡(士茂谷)의 초입에 이르니 도무지 사람이 살 만한 골짜기로는 여겨지지 않았다(「사무곡」은 강원도 삼척시 신기면 대평리의 「우체부도 들어오지 않는」 마을이다). 곡벽(谷壁)은 벼루처럼 가파르고, 물길이 지나는 골짜기 바닥은 한달음에 건너뛸 수 있을 정도로 폭이 좁았다. 비좁은 골짜기에선 마을이나 농토는커녕 초가 한채도 들어앉기 어려울 성싶었다. 몇사람에게 물어 찾아온 길인데도 몇번이나 「길을 잘못 들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체부도 오지않는 마을
삼척시 신기면의 첩첩산중에
자리잡은 정상홍씨의 굴피집과 주변 풍경.

그러나 길은 골짜기 안쪽 깊숙한 곳까지 뚜 렷하게 이어졌다. 깊숙dl 들어갈수록 골짜기 는 오히려 더 넓어지고 이따금 물가의 펀펀 한 둔덕에는 사람살았던 흔적도 간간이 눈에 띄었다. 틀림없는 집터인데도 대부분 억새와 잡목들이 빽빽하게 들어차 여느 덤불과 잘 분간이 되지 않았다. 반쯤 무너져내린 돌담 과 축대, 그리고 때깔 좋은 홍시가 매달린 감나무만 아니라면 옛 화전민의 자취임을 짐 작하기도 어려울 만큼…. 그래도 흉물스럽게 방치된 폐가는 한채도 없다는 게 다행스러웠 다.

여태껏 사무곡에 남은 집은 모두 세채. 사람 사는 두집 중 정상홍씨(68)의 굴핏집은 훤하 게 트인 산중턱에 자리잡고 있다. 집터가 워 낙 높기도 하거니와 주위에 넓은 밭들이 둘 러져 있어 시야가 아주 산뜻하다. 울 밖으로 몇걸음만 나서면 굽이굽이 흘러내린 골짜기 며 물결치듯 오르내리는 산자락이 한눈에 들 어온다. 더욱이 능선가까이에 동향으로 들어 앉은 첩첩산중의 집터치고는 일조량도 풍부 하다. 바깥세상으로 드나는 길이 조금 멀고 험한 것 말고는 누대로 뿌리를 내리고 살 만 한 조건들이 제대로 갖춰진 집이었다.

정씨의 굴핏집은 정면 세칸, 측면 두칸 규모 의 전형적인 겹집이다. 각기 한칸쯤 되는 네 개의 방이 왼쪽에 몰려 있고, 오른쪽에는 외 양간과 작은 허드렛방이 딸린 부엌이 있다. 그리고 맨 오른쪽의 달개(처마 끝에 늘여 지 은 허술한 칸)에는 측간과 디딜방앗간이 들 어앉았다. 기본적으로는 북방식의 폐쇄적인 가옥형태를 갖췄으면서도 지붕에 까치구멍 (용마루 양끝의 바로 아래쪽에 까치가 드나 들만한 크기로 만들어놓은 환기 구멍)을 두 지 않았고, 방이 몰려 있는 왼쪽에 높은 토 방과 긴 툇마루를 설치했다. 나름대로 남방 식의 개방적인 가옥형태를 일부 반영한 것 같았다.

“밥도 손수 짓지요”
정씨가 저녁밥을 짓기에
앞서 군불을 지피고 있다.

흙과 나무로만 지은 집은 대체로 주인이 조 금만 무심해도 금세 허름해지게 마련이다. 특히 굴핏집은 지붕에 올려진 굴피가 썩으면 빗물이 새고 보온력이 떨어지기 때문에 적어 도 5년에 한번쯤 새로 올려야 한다. 그러나 정씨가 사는 굴핏집은 안팎이 두루 단정하고 튼실해 보일 뿐더러 주인의 정성과 손길이 구석구석마다 스며 있었다. 마루 토방 마당 과 방안의 대자리(竹席)는 방금 비질이나 걸 레질을 한 것처럼 깨끗했고, 집 주변에 둘러 쳐진 바자울도 가지런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돋보이는 것은 역시 굴피지 붕이었다. 아래쪽부터 두겹씩 엇갈리게 해서 굴피를 덮었는데, 비 한방울도 샐 수 없을 만큼 간격이 일정하고 촘촘했다. 이처럼 멀 쩡한 지붕인데도 마당 한켠에는 갓 벗겨낸 듯한 굴피가 층층이 쌓여 있다. 정씨는 『올 가을에 새로 굴피를 올리려고 벗겨다 놓은 것인데, 일손을 못구해 그냥 쌓아 두고만 있 다』고 말했다.

이 굴핏집은 정씨가 서른살쯤 됐을 무렵에 손수 지은 것이라고 한다. 얼추 40년 가까이 된 셈이다. 그 전에는 골짜기 안쪽으로 5리 쯤 더 떨어진 옛집에서 나고 자랐다. 그러나 옛집에 대한 추억은 별로 남아 있는 게 없 다. 「친구도 없고 글방에도 한번 못가본 채 오직 일만 하면서」 살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장가가고 군대갈 때까지 삼척 읍내에도 나가 본 적이 없었고, 까막눈이 신세도 군대에 들 어가서야 간신히 면할 수 있었다. 제대하고 돌아오자 부친은 그동안 모은 돈으로 땅과 집터를 장만해서 이사를 하기로 했다. 정씨 는 내심 골짜기 아래 큰 마을로 나가기를 기 대했지만 결국 이 골짜기를 못벗어났다.

이 골짜기에는 화전정리사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만 해도 서른가구 남짓 화전민들 이 모여 살았고, 10년 전까지는 울타리를 맞 댄 이웃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정씨와 골 짜기 아래쪽에 사는 이씨네만 남았다. 정씨 는 스물두살 때 노곡면에 사는 세살 연하의 처녀와 혼인해 2남2녀를 뒀으나 지금은 자식 들 모두 가정을 꾸려 독립했다. 부인도 삼척 시내에서 큰아들네와 함께 살며 과일 노점을 하고 있기 때문에 집에는 정씨 혼자만 남았 다. 이웃 하나없이 가족과 떨어져 사는 게 외롭고 쓸쓸하긴 하지만, 산중에서의 외로움 보다는 도시생활의 무료함을 더 견디기 어렵 다고 했다.

『자식들은 혼자 있지 말고 그만 오라고들 하 지만 여길 떠나 도시로 가면 할 일이 없어 요. 기껏해야 노인정에나 다니면서 헛돈만 쓰게 되지. 그러니 답답해서 하루도 지내기 힘들어. 고맙게도 아직은 몸도 건강해서 일 할 수 있고 또 자식들한테 짐되기도 싫고…』

그의 하루하루는 어찌나 분주한지 외로움 따 위는 미처 느낄 겨를도 없어보였다. 일과는 새벽 다섯시부터 시작되는데, 해가 길거나 짧거나 늘 한결같다고 한다. 잠자리에서 일 어나자마자 방과 마당을 청소한 뒤 간단하게 아침식사를 한다. 밥상을 물리고 나면 이틀 에 한번씩은 20ℓ짜리 물통 두개를 지고 샘 터에 가서 물을 길어와야 한다. 아무리 이력 이 난 일이더라도, 왕복 20분 거리의 샘터에 서 40㎏짜리 물통을 짊어지고 오는 일이 만 만해 보이지 않았다. 이런저런 집안일에 열 중하다 보면 해가 산등성이 위로 솟아오른 뒤에야 밭일을 시작한다.

정씨 소유의 밭은 7000평 가량 되지만 이미 오래 전 대부분 묵밭으로 변했다. 그 까닭을 그는 『일손도 없고 쟁기질 할 소도 없는 처 지에 그 많은 밭을 도저히 일굴 수가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더욱이 찻길조차 없어 무 배추 감자같은 무거운 채소는 대규모로 경작 할 수도 없다. 내다 팔 것으로는 주로 콩 깨 마늘 옥수수 고추 등과 같이 비교적 가벼운 작물을 심고, 파 상추 배추 무 등은 자급자 족할 만큼만 심는다. 그래서 밭일은 별로 많 지도 않고 별 이득도 없다고 한다.

“먹을 만큼만 심어요”
마늘씨를 심기위해 밭을 갈고 있다.

정씨의 주된 수입원은 산일이다. 봄부터 늦 가을까지 산자락과 골짜기를 오르내리며 두 릅과 초피 열매를 따거나 더덕과 황기를 캔 다. 그리고 머루같은 산열매를 따서 부인의 과일 노점을 통해 팔기도 하는데, 올해에는 머루만으로도 30만원을 벌었다고 했다. 겨울 의 문턱에 들어선 요즈음에도 정씨는 여전히 할 일이 많다. 밭이 얼어붙기 전에 마늘종자 도 심어야 하고, 밤에는 침침한 호롱불 아래 에서 곶감 만들 감도 깎아야 하기 때문이다. 딱히 할 일이 없을 때에는 산죽이나 싸리나 무로 삼태기 소쿠리 바구니 등 생활용품들을 엮기도 한다.

정씨의 이런 삶을 세세히 들여다보고 있으니 문득 「아직도 영락없는 화전민이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비록 화전을 경작하지는 않 지만, 자연에 의지하는 정씨의 삶은 화전을 일구던 그 시절과 전혀 다르지 않을 듯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변함없는 것은 대자연의 섭 리에 순응하며 안분지족하는 순박한 심성과 따뜻한 마음이었다. 그의 굴핏집이 유난히 아늑하고 아름답게 느껴지는 까닭도 그 때문 이었다.


양영훈〈여행칼럼니스트〉


§ 참조하세요

양통집
한 용마루 안에 방을 앞뒤로 겹쳐놓은 집이 기 때문에 「겹집」이라고도 한다. 강원도와 경북의 산간지방에 많은 가옥형태다. 방과 방은 대체로 겹으로 배치되고, 외양간 고방 방앗간 등은 몸채 안에 붙인다. 그리고 마루 는 건물 안에 두거나 아예 두지 않으며, 부 엌의 연기가 잘 빠져 나가도록 하기 위해 지 붕의 용마루 양끝에는 까치구멍을 둔다. 건 물 전체의 평면은 전(田)자 모양인데, 열손실 이 적고 동선(動線)이 짧아지기 때문에 춥고 긴 겨울을 나기에 적합하다.

화전정리사업
약탈경제인 화전은 산림을 황폐화시키는 가 장 큰 요인일 뿐더러 홍수 산사태 가뭄 같은 자연 재해의 원인(遠因)이 되기도 했다. 그래 서 조선시대나 일제 때에도 화전금지정책이 끊임없이 시도됐으나 큰 효과를 거두진 못했 다. 본격적인 화전정리사업은 1968년 11월 발생한 「울진-삼척 무장공비 침투사건」이 계 기가 됐다. 이 사건 직후에 공비들의 침투로 를 봉쇄한다는 목적으로 화전민들의 집단이 주가 시작됐는데, 그해 4월에 이미 「화전정 리법」이 공포됨으로써 법률적 근거도 마련돼 있었다. 그 뒤로 74년에는 「화전정리 5개년 계획」이 수립됨으로써 더욱 강력한 화전정리 사업이 이뤄졌다. 이주 보조금을 지급해 화 전민들을 평지 마을이나 다른 지역으로 이주 시키고, 국유림내의 화전에는 낙엽송과 잣나 무 등을 심어 작물의 경작을 금지했다. 이에 따라 70년대 말에 이르러서는 강원도의 전체 화전 중에서 94%가 다시 산림으로 복구됐 다.

‘환선굴’신비 끝내줘요

겨울바다의 정취
삼척시 원덕읍 신남마을의
파도치는 겨울바다의 모습.

삼척지방은 태백산맥의 우람한 산줄기와 맑 고 푸른 동해를 함께 품고 있어 그야말로 산 도 좋고 바다도 좋다. 특히 신기면 대이리의 환선굴은 삼척을 대표하는 관광지일 뿐만 아 니라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석회동굴 로도 손꼽힌다.

「대이리석회동굴군지대」(천 연기념물 제178호)에는 환선굴말고도 갈매굴 제암풍혈 양터목세굴 큰재세굴 덕발세굴 등 약 4~5억년 전에 생성된 석회동굴이 밀집해 있는데, 그중 환선굴의 일부만 97년 가을부 터 일반인에게 개방됐다.

동굴내부에 흐르는 지하수의 수량이 풍부해 크고 작은 폭포와 소(沼)가 곳곳에 있고, 물 의 침식-퇴적작용으로 형성된 종유석 석회화 단구 석순 석주 등의 2차 생성물들이 환상적 인 지하세계를 연출한다. 대이리 주차장에서 환선굴의 입구까지는 도보로 30~40분쯤 걸린 다.

환선굴 아래 대이리 골말에는 너와집 굴핏집 통방아 등 옛 화전민들의 전통적인 생활상을 보여주는 유물이 남아 있다. 특히 중요민속 자료 제221호로 지정된 이종옥씨의 너와집에 서는 「고콜」이라 불리는 전통 벽난로도 볼 수 있다.

삼척의 바닷가는 어느 곳이나 자연 경관이 아름다우면서도 인적은 드물어서 겨울바다의 정취를 만끽할 수 있다. 7번 국도가 지나는 한재와 용화리 해안절벽에서 바라본 동해안 의 조망도 장쾌하고, 원덕읍 신남마을의 파 도치는 해변도 인상적이다. 포구의 풍정을 즐기려면 근덕면의 장호항이나 원덕읍의 임 원항을 찾아가볼 만하다. 특히 임원항에 가 면 동해안의 어느 포구보다도 싸고 푸짐하게 생선회를 맛볼 수 있다.


 
출처 : 블로그 > 오지마을/e-이장 | 글쓴이 : e-이장 [원문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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