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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필리핀의 타우바투족(TAW BATU)

지리산자연인 2006. 2. 5. 15:57
필리핀의 타우바투족(TAW BATU)


장대비는 그쳤지만, 천둥은 간간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계곡을 뒤흔들었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우키르스(Ukris)가 물었다. "당신네 나라에도 정말 달이 있나요?" 우리는 그의 가족이 살고 있는 동굴 속에 함께 앉아 있었다. 밖에는 이미 짙은 어둠이 깔렸고, 동굴 벽에는 관솔불(송진이 많이 엉긴 소나무의 가지나 옹이에 붙인 불)에 비친 사람의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물론입니다. 우리나라에도 달이 있어요." "그렇다면 당신네 나라에 가보고 싶군요." 그의 차분한 목소리가 동굴속으로 울려 퍼졌다.
지구상에 문명과 완전히 단절된 세계가 있다면 바로 이런 곳일 게다. 필리핀 팔라완(Palawan) 섬 남쪽, 우림으로 뒤덮인 싱나 판(Singnapan) 계곡에는 '동굴에 사는 사람들'을 뜻하는 타우바투(Taw Batu)족이 살고 있다.
수백 년 전 이 곳으로 이주해 온 타우바투 사람들은 현재 40가구에 200여명이 살고 있는데, 이들이 언제 어디서 이곳으로 왔는 지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고 있다. 팔라완족과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타우바투족이 이 섬뿐만아니라 전세계에서도 유일무이한 고 유의 생활방식을 지켜 올 수 있었던 것은, 다름아닌 싱나판 계곡의 우림에 의한 고립된 생활때문이다.
우리가 처음 싱나판 계곡을 찾은 것은 1988년 7월이었다. 이 지역은 필리핀 국립박물관이 지정한 특별보호구역으로 허가 없이 는 들어갈 수 없었다. 이같은 특별보호령은 경작지를 찾아 모여드는 이주민들로부터 타우바투족을 보호하기위해 1970년대 말 당 시의 마르코스(Marcos)대통령이 취한 조치라고 한다. 그러나 우리가 직접 경험한 바로는 이런 조치에도 불구하고 타우바투 사람 들의 토지는 이주민들로 인해 상당히 줄어들었고, 그 때문에 이들은 외부인에 대해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우리가 이곳을 처음 방문했을 때, 그들의 반응은 다소 냉담했다. 우리는 통역관을 통해 우리가 이 곳에 온 것은 단지 평화로운 목적일 뿐이며, 전염병에 걸리지도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었다. 그제서야 타우바투 사람들은 대나무와 야자수 잎으로 지 은 계곡 아래의 집으로 우리를 안내했고, 곧이어 질문을 퍼부었다. 어디서 왔느냐? 당신들이 사는 곳은 어떤 곳이냐? 숲에서 동 물들과 함께 살며 사냥도 하느냐? 비행기가 도대체 뭐냐? 우리가 대답할 때마다 그들은 매우 놀라워했다. 비행기라고 하는, 날아 다니는 집이 있어 거기서 먹기도하고, 화장실에도 갈 수 있다니...... 이방인의 나라에도 사슴과 멧돼지가 사는 커다란 숲이 있 으며,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살다니...... 우리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들은 엄청난 숫자에 현기증을 느끼는 듯했다. 거의가 친 척관계인 200명 남짓한 사람들이 고립된 계곡에서 새의 대부분을 보냈으니 그럴만도 할 것이다.
타우바투 사람들은 우리가 자신들의 언어와 문화에 남다른 관심을 갖고 이해하려 애쓰자 점차 우리를 신뢰했다. 그러나 그들만 이 아는 은밀한 도피처에 우리를 안내한 것은 그로부터 약 3주가 지나서였다. 당시 우리의 첫 방문은 순탄치 못했다. 현지에서 2개월을 보낸뒤인 8월 말, 우리 일행인 피에르(Pierre)가 말라리아와 뎅그열(급성 전염병으로 모기가 옮기는 출혈열)에 걸려 우 리는 즉시 마닐라로 철수했고, 병이 악화돼 파리로 되돌아와야 했다.
그로부터 약 2개월 뒤 다시 싱나판 계곡을 찾았을 땐 모든 집들이 텅 비어 있었다. 비는 끊임없이 퍼부었고, 계곡에서는 사람 의 자취를 찾아볼 수 없었다. 그 때 험준한 바위산 중턱에서 둔중하고 신비스러운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직 계곡에 머물고 있던 타우바투족 가운데 한 명이 우리에게 다가와 손가락으로 바위산 한 곳을 가리켰다. 몹시 가파른 바위 절벽에 육안으로는 식별하기 어려운 사다리가 걸려 있었다. 짐을 진 우리는 그의 뒤를 따라 사다리를 올라갔다. 암벽을 깎아 만 든 디딤대, 풀이 무성한 판자다리, 좁은 나무 발판..... 위험을 무릅쓰고 수백 미터나 이어진 사다리를 간신히 올랐을 때 우리는 이미 지칠대로 지쳐 있었다. 그러나 수개월 동안 우리가 그렇게도 보고 싶어했던 타우바투 사람들의 동굴 거주지는 사다리를 타 고 오를 때의 공포와 피로를 싹 가시게 해 주었다.
카와얀카와얀(Kawayan Kawayan) 우리가 이 곳에서 처음 알게 된 친구 우키르스가 사는 동굴의 이름이다. 거대하고 둥근 천장, 희미하게 사방을 비춰주는 관솔불, 속닥거리는 소리와 종소리가 동굴 속을 맴돌았다. 우키르스가 우리에게 다가와 미소를 지으며 손에 입을 맞추었다. 타우바투 사람들은 친한 친구를 맞이할 때에만 손에 입을 맞춘다고 한다.
그는 이미 우리가 계곡에 들어설 때부터 우리를 지켜 보고 있었다. 그가 사는 동굴 입구에서는 싱나판 계곡이 훤히 내려다 보 였다. 우키르스는 지배자나 성직자가 없는 타우바투족 사회에서 몇 안되는 지도자 가운데 하나이다. 나이가 제법 많은 그는 풍부 한 경험을 바탕으로 타우바투 사람들의 분쟁을 조정하고, 가벼운 죄에 대해서는 벌을 주기도 하는 재판관으로 통한다.
우기(雨期)가 되면 계곡에서 살 수 없기때문에 타우바투 사람들은 우기가 끝날때까지 2 - 5개월 동안 동굴에서 지낸다. 대개 8 월에 시작되는 우기는 이들에게 1년중 가장 힘든 시기이기도 하다. 벼를 수확해야 하기 때문이다.
타우바투 사람들은 쌀을 그 어떤 곡식보다도 중요하게 여긴다. 그래서 이들은 벼농사에 가장 정성을 들이며, 수확한 쌀은 조금 씩 아껴 먹는다. 기본 식량이면서, 물물교환으로 다른 물건을 살 수 있는 자본이기 때문이다.
8월이 되면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타우바투 사람들은 모두 들판으로 나가 등나무를 엮어 만든 바구니에 수확한 쌀을 담아 동굴 까지 나른다. 이 때는 장대비가 쏟아져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언제 닥칠지 모르는 태풍에 1년 벼농사를 망치지 않기 위해서는 하 루라도 빨리 수확을 마쳐야 하기 때문이다.
9월 초가 되면 계곡에서는 더 이상 생활할 수가 없다. 소낙비는 물을 퍼부듯 내리고, 태풍이 노도처럼 밀려들어와 나무기둥 위 에 세운 집을 마구 뒤흔들어 놓는다.
마지막 방문에서 우리는 우키르스의 친척인 툴리박(Tulibac)의 가족과 함께 생활하며, 피난처인 동굴로 이주하는 작업을 거들 었다. 8월이 되면서 일주일 이상 천둥이 치고 잔뜩 찌푸린 날이 계속되자 툴리박은 두 아들 우유트(Uyut)와 고들리칸(Godlikan) 을 불러 나뭇가지와 대나무로 사다리를 만들기 시작했다. 임신 중인 아내 우르니스(Urnis)와 이제 4살 밖에 안된 아들 말릭(Mali c)까지 데리고 그 험한 바위 동굴을 오른다는 것은 정말 힘든 일이었다. 그러나 이불과 돗자리, 옷가지, 도구, 그릇, 악기 등 모 든 살림살이를 옮기는 데는 겨우 3시간밖에 걸리지 않았다.
저녁이 되자 우리는 툴리박 가족과 함께 '우그포이'(Ugpoy) 동굴 속에 웅크리고 앉아 천둥신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툴리 박 가족과 그의 동생네 가족이 마지막으로 올라왔으므로 이제 타우바투 사람들 모두가 동굴 이주를 마친 셈이다.
사람들은 말없이 앉아 동굴 밖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계곡에서 생활하면서 우리는 천둥신을 노엽게해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한번은 어린 말릭이 지렁이를 보고 웃자, 그의 아버지가 호되게 꾸짖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웃음을 그치지 않으면 천둥의 신 둘득(Duldug)의 번개를 맞게 될 게야!" 천둥신은 사람들이 동물을 보고 웃음거리로 삼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했다. 말릭은 웃음을 뚝 그쳤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름 한 점 없던 하늘에서 갑자기 장대비가 쏟아지고, 빽빽한 밀림이 거세게 흔들리면서 푹풍이 몰아쳤다. 머리서부터 천둥소리가 들려오자 겁이 난 말릭은 엄마에게 달려가 바싹 붙어 앉았다. 천둥소리가 커지고 첫 번개가 번쩍 하면서 하늘을 갈랐을 때, 우르니스는 급히 속눈썹 한개를 뽑아 한 줌의 쌀알과 함께 불 속으로 집어던졌다. 그녀의 얼굴은 공포에 질려 있었다.
천둥의 신 둘둑, 진병과 죽음의 전령인 사이탄(Saitan)과 살락(Salag). 타우바투 사람들은 온 세상이 영(靈)으로 가득 차 있다 고 믿는다. 하늘, 땅, 바위, 동굴, 나무 등 모든 장소와 모든 생명체에는 크든 작든 신고 같은 성스러움이 있어 제(祭)를 올리가 나 금기를 지켜야 한다.
하지만 모든 신령이 둘둑처럼 그렇게 악하거나 파괴적인 것은 아니다. 뿐 아니라 타우바투 사람들이 해마다 일정 기간을 동굴 속에서 보내는 것도 전적으로 둘둑에 대한 두려움 때문만은 아니다. 물론 바위 동굴로 이주하는 것은 우기를 피하기 위한 것이지 만, 수세대를 거치는 동안 자연스럽게 형성된 생활의 한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의 동굴 생활은 나름대로 리듬이 있다. 우 기와 함께 시작되는 벼 수확이 끝나면 이들은 달콤한 휴식에 빠져들어 음악을 연주하고, 놀이를 하거나, 잡담을 나누거나 실컷 잠을 자기도 한다.
사람들은 가끔씩 대나무 횃불을 들고 동굴 속의 미로를 따라 박쥐와 칼세의 둥지를 찾는가 하면, 동국 아래로 내려가 달팽이나 가재를 잡기도 한다. 박쥐를 잡을 때는 동굴 입구를 막고 조그만 구멍만 남겨 놓는다. 박쥐가 동굴의 작은 구멍을 통해 빠져 나 가려 할때 나무 방망이로 내리치거나 날카로운 장대로 찌른다. 이러한 일은 결코 다순한 소일거리가 아니다. 동굴속은 생각보도 춥고, 날카로운 바위 모서리가 곳곳에 있어 한 순간 발을 잘못 디디면 심한 상처를 입게 된다. 이 같은 위험에도 아랑곳하지 않 고 이들은 동굴 속을 뛰어다니는데, 어떻게 헤서든 요리 잼비를 채워야 하기 때문이다.
사실 과일이나 채소만으로 끼니를 이어 갈 수는 없다. 게다가 채소는 계곡으로 내려가 바위 동굴로 날라와야 한다. 계곡에서 불 과 몇 미터밖에 되지 않는 높이의 동굴에 사는 몇몇 가구는 그래도 좀 수월한 편이지만, 가파른 벽을 기어올라 100여 미터 이상 을 올라가야 하는 툴리박과 그의 일가에게는 만만치 않은 일이다.
이른 새벽, 동굴 입구에서 내려다본 싱나판 계곡에는 안개가 두텁게 깔려 있었고, 태양은 아직 산 뒤에 숨어 보이지 않았다. 문 득 동굴 안에서 하루를 시작하는 소리가 들렸다. 우르니스가 부싯돌에 쇠를 내리치는 소리였다. 흔들이는 불빛 너머로 추위를 견 디기에는 너무 딱딱한 다탁스(Datags)위에서 이불을 말아 덮고 자는 사람들이 보였다. 다탁스는 대나무를 일정하게 쪼개어 이를 엮어 만든 침대 모양의 대(臺)로, 크기는 1.5미터쯤 된다. 이 다탁스 아래에 불을 놓아 두면 대나무가 따뜻하게 달구어져 잠을 자는 동안 추위를 막아준다.
툴리박 가족이 지내는 동굴은 유난히 밤이 길다. 또 습기가 많고 춥기 때문에 날이 밝을 때까지 다탁스 아래의 불을 여러차례 부채질해야 한다 한밤중에 깨어 보면 부채질하는 소리가 들리다가 이내 적막이 감돌곤 했다. 모두가 잠든 동굴에는 부엉이 울음 소리와 바람 소리만이 적막을 깨고 있을 뿐이다.
아침이면 우르니스가 큰 소리로 자는 사람들을 깨운다. 그러면 하나 둘씩 달팽이가 껍질을 벗듯 이불 속에서 기어 나와 동굴 한 켠의 세명 장소로 간다. 거기에는 동굴 천장에서 대나무 관을 타고 내려온 물리 항아리 속에 가득 담겨 있다. 화장실에 가려면 동굴 밖으로 나가야 한다. 동굴 통로에 용변을 보는 것은 엄격히 금지되어 있다. 동굴신이 불쾌하게 여기기 때문이다.
잠꾸러기 아이들은 우르니스가 아침 식사를 위해 삶고 있는 박쥐와 칼새고기 냄새를 맡고 서야 일어난다. 이에 곁들여 마니오크 (마니호트속<屬> 식물로 열대지방에서 뿌리를 먹는다.) 와 쌀을 대나무 줄기에 넣어 먹는다.
동굴 속의 일상생활은 매일 이렇게 시작된다. 며칠에 한 번씩 우르니스는 큰딸과 며느리, 조카딸을 계곡 아래로 내려보내 채소 를 가져오도록 했다. 그리고 자신은 다탁스에서 며칠 전에 태어난 에리타(Erita)를 돌본다. 당분간은 몸조리를 잘 해야 할 것이 다. 그러나 휴식은 오래 가지 않는다. 투리리박이 3줄 현악기인 쿠들롱(Kudlong)을 연주하자 조카 레이아만(Leyaman)이 징을 치 며 응수했다. 낮고 세련된 음이 동굴 벽에 부딪혀 은은하게 울려 펴졌다. 오후 늦게 계곡으로 내려갔던 여자 아이들이 비에 젖은 채 마니오크와 바나나, 땔감나무를 가득 지고 돌아왔다. 아이들은 지쳐 보였지만 악기의 리듬에 맞추어 몸을 움직이기 시작하더 니 잠시 뒤에는 바위위에서 발을 구르며 춤을 추기 시작했다. 여러 세대에 걸쳐 이렇게 춤을 추어서인지 바위는 반질반질하게 윤 이 났다. 어느 새 구름이 걷힌 계곡에는 늦은 오후의 태양이 산봉우리 아래로 서서히 미끄러져 내려가고 있었다.
타우바투족은 동굴 속에서 대개 연말까지 지낸다. 그 때쯤이면 우기도 끝나고, 사람들은 하나둘씩 계곡으로 내려가 밭을 손질하 고, 비와 태풍으로 부서진 집을 수리한다.
새해가 시작되면 싱나판 계곡은 도끼소리로 가득 넘친다. 타우바투족 사람들이 화전을 가꾸기 위해 숲을 파헤치기 때문이다. 해 마다 이 시기가 되면 밭을 개간하거나 숲을 태워 새로 밭을 만든다. 마을 사람들은 툴리박에게 4년 전부터 버려 두었던 밭을 다 시 경작하라고 부추겼다. 그러나 그 땅은 접근하기 힘든 숲 속에 있어 다시 개간하기가 여간 힘들지 않았다.
툴리박은 큰아들과 함께 긴 정글용 칼로 덤불을 잘라낸 다음, 나무를 베기 시작했다. 한참 동안의 도끼질 끝에 커다란 나무가 굉음을 내며 쓰러지자 사람들 사이에서 환호가 터져 나왔다. 이 순간만큼은 숲을 정복했다는 짜릿한 감정에 사로잡힌다.
2월이 되면 베어 온 풀과 덤불을 개간한 밭에 펴 말린다. 그런 다음 이 풀을 태우는데, 불이 잘 타면 풍년이 든다고 한다. 풀을 태운 뒤 사람들은 언제 씨앗을 뿌려야 하는지를 알려 주는 북두칠성이 나타나기를 기다린다. 이들은 들일을 나가기 전에는 항상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는데, '죽능 달'이라고 하는 초승달이 있을 때는 아무도 곡괭이를 들지 않으며 곡식을 따는 것도 금지되 어 있다. 농사에 불행을 가져다 준다고 믿기 때문이다.
계곡에서 생활알 때도 동굴에서와 마찬가지로 수많은 금기를 지키는 것이 일상화되어 있다. 어떤 특정 지역에서는 절대 나무를 베지 않으며, 피리새의 노랫소리가 들리기 전에는 절대 길을 나서지 않는다. 또 사냥을 할 때는 먼저 권숭이신이나 멧돼지신에게 잡고자 하는 동물 오양의나무조각을 바친다.
타우바투족은 여러 신을 섬기지만, 제물을 바치는 일은 하지 않는다. 때문에 물질적 남비가 심한 축제도 없다. 악령이 질병이나 불행을 가져다 주면, 사람들은 무관심으로 이를 견뎌낸다. 악령은 사람의 힘으로 막을 수 없다고 믿기 때문이다. 말라리아, 장 염, 감기 같은 질병으로 자주 발생하고, 사냥을 하거나 동굴에서 일을 ㅎ 보면 사고가 나게 마련이지만, 이는 어쩔 수 없이 감수 해야 하는 것으로 여기고 있다. 3년 전, 네 번째로 이곳을 방문했을 때 우리는 타우바투 사람들이 상당히 불안해 하고 있음을 느 꼈다. 마을에 불길한 일이 있을 것이라는 징조는 사실 2년 전 이 곳에서의 체류를 끝내고 계곡을 떠날 때 이미 예감했던 것이다. 당시 싱나판 계곡에서 타우바투 친구들과 헤어진 아음 해안길로 접어들었을 때, 우리는 지난 몇 개월 사이에 넓은 신작고가 새 로 생겨난 것을 보았다. 해안지에 있는 란상(Ransang)마을에서 산으로 들어가는 초입에는 새로 지은 기독교 전도관이 있었다. 우 리는 이 전도관을 지나다가 우키르스를 만났는데, 싱나판 계곡에서와는 영 다른 모습이었다. 그는 피에르에게 다가가 타우바투족 전통대로 두 손에 입을 맞추는 대신 양족볼에 입을 대었다. 그리고는 다소 긴장한 얼굴로 말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 름으로 기도합니다."
우키르스의 뒤에는 그의 사위 루미하이(Lumihay)가 서 있었다. 그 역시 아주 달라 보였다. 말씀하게 빗질이 된 머리와 새 셔츠, 반바지, 그리고 손에는 성경을 들고 있었다. 얼굴에는 웃음을 띠고 있었지만 그 역시 긴장감을 감추지는 못했다.
나중에야 우리는 우키르스와 그의 가족이 '신의 집회'라는 종파의 기독교 신도가 되었음을 알았다. 루미하이는 목사가 되기 위 해 학교를 다녔다고 했다.
팔라완 섬의 행정도시인 푸에르토프린세사(Puerto Princesa)에서 공부를 마친 뒤, '싱나판 계곡의 순박한 사람들을 악마와 무지 에서 해방시켜야 한다'는 소명을 갖고 돌아왔다는 그는 싱나판 계곡 중앙에 교회를 지어 타우바투 사람들의 원시적인 전통을 없 앨 것이라고 말했다.
툴리박의 집에서는 그러나 모든 것이 예전 그대로였다. 우리가 도착하자 십 수명의 이웃과 친구들이 야자수 잎을 엮어 만든 툴 리박의 집으로 몰려와 우리를 맞이했다. 분위기는 즐거웠으나 그 바탕에는 왠지 모를 불안이 깔려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갑자 기 툴리박이 큰 소리로 물었다. "정말 예수가 있나요? 그를 몬 적이 있어요? 그를 믿지 않으면 불지옥에 떨어진다는 것이 정말인가요?" 타우바투 사람들은 지난 2년 동안 열화같은 기독교 전도에 시달렸다. '신의 집회'라는 종파의 선교사들은 신 도를 끌어들이기 위해 아주 원시적인 방법을 사용했다. 그들은 한 번도 영화를 본 적이 없는 타우바투 사람들에게 예수의 생애를 다룬 영화를 보여 주면서, 놀라는 사람들에게 영화 속의 예수는 사실 영화배우일 뿐이며, 빵이 불러나는 기적은 단지 속임수라 는 것을 설명해 주지 않은 것이다.
때문에 우리는 이를 하나한 설명하면서 이들을 진정시켜야 했다. 여러 주일 동안 우리는 끊임없이 이어지는 그들의 질무네 답하 면서 자신들의 오랜 전통을 굳건히 지켜 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결국 기독교를 믿게 된 사람들과 믿지 않는 사람들이 모두 모여 의논한 결과, 교회를 짓는 계획은 무산되었다. 현재 40가구 가 운데 35가구가 옛 생활방식을 지키고 있으며, 싱나판 계곡 보호령에 따라 타우바투족 영토 안에 선교단체가 들어오지 못하게 되 었다.
그러나 타우바투족의 미채는 여전히 불투명하다. 수개월 전 마닐라에 갔을 때 보호구역의 상당 부분이 새 이주자들에게 양도될 것이라는 소식을 들었다. 이 계획이 현실화되면 타우바투 사람들
의 생활 반경은 계곡 안으로만 한정될 것이다. 우리가 싱나판 계곡을 떠나던 날, 툴리박이 조용히 물었다. "당신네 나라에 는 사람이 얼마나 사나요?" "대략 4000만 명 정도 삽니다." 그는 그 엄청난 수에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 다. 그리고는 매우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살 땅이 없으면 우리에게 와서 가져 가세요."

GEO 96년 8월호 발췌
출처 : 오지를꿈꾸는사람들
글쓴이 : e-이장.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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