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리터리·통일

[스크랩] 광주항쟁의 학살에 대한 미국배후설에 대해

지리산자연인 2006. 4. 10. 14:44

흔히 좌파들이 내세우는 주장중에 하나가 미군은 한국군의 작전통제권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광주로 계엄군이 이동하는것을 허락했으며

광주학살의 배후에는 미국이 있다고 주장한다

여기에 그게 얼마나 터무니없는 주장인지를 명확히 보여주는 글이 있다

이 글은 좌파는 아니더라도 주로 운동권쪽 사람들이 만들었다

 

아래에 보듯이 79년 부마항쟁이 있었고 비상계엄이 선포되었고

공수부대가 투입되었다

이때는 미국과 박대통령간에 사이가 극히 나쁠때였다

박대통령은 핵무기를 개발중이었고 10.26에는 미국이 배후에 있다는 이야기도 많다

하지만 여전히 박대통령은 미군이 작전통제권을 가지고 있음에도 군대를 투입했다

그리고 많은 사상자가 있었다

 

광주항쟁에서 전두환정권의 학살에 미국이 배후에 있다는 주장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주장인지는 아래의 글이 확실히 보여준다

미군이 작전통제권을 가지고 있지만 그건 한국군 장성이 명령을 듣지 않으면 그만이다

미군에겐 인사권이 없다

 

5.18은 분명 전두환이 정권을 잡으려고 시민들을 죽인 사건이라고 봅니다

그리고 광주항쟁이 많은 희생자를 낸데에는 여러가지 예기치 못한 상황이 벌어졌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거기에는 시위대의 잘못도 한 부분을 차지합니다
광주항쟁에서 첫번째 사망자는 공수부대원이었습니다
그에 흥분한 군인들이 과격하게 나온것도 있고... 광주시민들이 무장하기 시작한 것도 희생자가 많았던 이유입니다

 

[실록민주화운동]부마민주항쟁
2004/04/26 오후 1:57 | 역사 바로알기

그토록 견고해 보이던 유신독재도 1979년에 이르면 YH무역 신민당사 농성 강제해산과 신민당 총재단 직무정지 가처분 결정, 김영삼 신민당 총재 제명에서 보듯이 제도권 야당마저 철저히 유린하는 말기적 탄압을 통해서만 겨우 지탱이 가능한 상태에 이르게 된다. 박정희 정권 18년 동안 시달릴 대로 시달린 국민들의 염증과 분노도 깊어져만 갔다.


79년 10월15일. 눈이 시리도록 파란 하늘 아래 금정산 기슭의 부산대 교정. 조용하기만 하던 캠퍼스는 9시30분을 전후로 교내 곳곳에 뿌려진 두 종류의 유인물로 술렁이기 시작했다. 민주선언문과 민주투쟁선언문이라는 이름의 두 선언문은 똑같이 15일 오전 10시 도서관 앞을 시위 집결지로 하고 있었다. 이날 시위는 이진걸(공대 3년) 그룹과 신재식(법대 2년) 그룹이 준비했다. 그러나 학생들로부터 별다른 반응이 없자 이들은 오전 10시20분쯤 일단 실패로 단정하고 분노를 삭이며 학교를 빠져 나왔다. 이날 시위는 비록 실패로 끝났지만 1,200여장의 이 두 선언문이 잔잔한 호수 위에 던져진 돌멩이처럼 학생들의 가슴 속에 깊은 파문을 일으키고 급기야는 다음날인 10월16일 유신독재의 심장부를 강타하는 격랑의 예고가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10월16일의 날이 밝았다. 아침 9시30분쯤 한 학생이 상대 벤치 앞에서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바로 부마항쟁의 도화선이 되었던 이날 데모의 주동자 정광민(상대 2년)이었다. 전날 밤 유인물 등사작업으로 밤을 지샌 그는 함께 하기로 한 동료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10시가 가까워지도록 동료가 나타나지 않자 더 이상 지체할 수 없다고 생각한 그는 혼자서 인문사회관 306호 강의실로 들어갔다. 그는 40여명이 공부하고 있던 강의실 뒤쪽에서부터 유인물을 나눠주며 강단으로 뛰어올라가 상기된 얼굴로 열변을 토했다. “여러분! 드디어 때가 왔습니다. 저 유신독재정권에 맞서 우리 모두 피흘려 투쟁합시다!”


학생들이 마치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의자를 박차고 밖으로 몰려 나갔다. 다른 학생들까지 가세해 인문사회관 앞에는 순식간에 100여명의 시위대가 형성되었다. ‘독재타도’의 구호가 터져나왔다. 74년 이후 5년 동안 단 한차례의 데모도 일어나지 않아 ‘유신대학’이란 조롱까지 받던, 그 때문에 항간에는 서울의 이화여대에서 가위를 포장해 소포로 부쳤다는 소문까지 나돌던 부산대가 구호 소리와 함께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아침 일찍부터 낌새를 채고 잠복하고 있었던 사복형사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정광민이 도서관에 있던 학생들을 끌어내기 위해 안으로 들어갔다 나오는 순간 두 명의 사복형사가 그의 멱살을 잡으며 덮쳤으나 우르르 몰려든 학생들에 에워싸여 뭇매를 맞고 3m 언덕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500여명의 학생들은 서로 어깨를 걸고 “독재타도! 유신철폐!” “학원사찰 중지하라!” “구속 학생 석방하라!”를 외치며 본관 쪽을 향해 뛰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시위대가 정문이 바로 보이는 운동장을 한바퀴 돌고 나올 때는 7,000여명으로 불어나 있었다. 시위가 전혀 예상 밖의 폭발적인 열기로 진행되면서 학생들은 11시부터 페퍼포그를 앞세우고 저지하는 경찰들을 뚫고 3개의 대열로 나뉘어 차례로 거리로, 시내 중심가로 진출했다.


새벽벌(부산대의 교정 이름)을 뒤흔든 ‘유신철폐 독재타도’의 함성은 부산대생들이 16일 오후 2시 남포동 부영극장 앞에 재집결하면서 부마항쟁의 불을 댕기는 불씨가 된다. 200~300명씩 스크럼을 짠 시위대들은 중심가인 남포동과 광복동을 오가며 “유신철폐, 독재타도!”를 외쳤다. 오후 3시께는 국제시장에 2만~3만명이나 되는 군중이 모여 구호를 외쳤다. 시위에 직접 나서지 않은 시민들도 학생들에게 열띤 지지를 보냈다. 김밥, 우유, 달걀, 박카스, 담배가 줄을 이어 시위대에 건네졌다. 학생들이 경찰에 쫓겨 가게로 들어가면 셔터를 내려 숨겨주었고 건물 위에서는 추격하는 경찰에 연탄재, 화분, 재떨이, 병 등을 던져 진압을 방해했다. 밤 8시가 넘어서자 시위대는 남포동 파출소를 파괴하고 경찰을 포위해 순찰차와 작전차를 불태웠으며, 3만~5만 인파의 장엄한 행렬이 남포동 일대를 가득 메웠다. 시위대는 “10시부터 통행금지를 실시한다”는 당국의 발표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새벽 1시까지 파출소 11곳을 부수고 박정희의 사진을 꺼내 불태우는 등 시민항쟁의 양상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틀째인 17일엔 교내 시위를 마친 동아대 학생들이 임시휴교 조치가 내려진 부산대생들과 시내 곳곳에서 합세하기 시작했다. 시위대 속에는 이제 학생보다 시민들이 더 많았다. 이들은 세무서와 동사무소, 언론사에 돌을 던져 항의하고 미국문화원 앞에선 제2관구사령관의 지프와 호송차를 습격하기도 하였다.


시위가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되자 박정희는 부산지역에 18일 0시를 기해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공수부대를 투입했다. 이들은 얼굴에 흙칠을 하고 풀잎으로 위장한 완전무장으로 참나무 몽둥이를 들고 시민들에게 무자비한 폭력을 휘둘렀다. 궂은 비가 내리고 어둠이 깔려 스산한 분위기를 더했던 18일 저녁 7시55분쯤 남포동 동명극장 앞에 모여든 2,000여명의 시위대는 계엄군이 지키는 시청 앞으로 나아갔다. 그러나 대검을 꽂은 M16을 휘두르며 최루탄을 쏘아대는 공수부대의 무자비한 진압에 의해 시위대는 해산했고 무수한 시민들이 부상을 당하면서 부산시내는 다시 계엄군의 총칼에 의한 ‘강요된 침묵’ 속으로 빠져들었다. 연 사흘에 걸친 부산지역의 민주항쟁은 이렇게 끝나고 말았다.


그러나 이날 항쟁의 불길은 이미 마산으로 확산되어 맹렬히 타오르고 있던 중이었다. 마산의 경남대생들은 18일 오전 부산에 계엄령이 선포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도서관 앞에 있는 나무와 게시판에 ‘청년학도여, 우리나라 거리마다 우리의 맑은 피를 뿌리자!’란 격문을 붙였다. 아울러 “지금 부산에서는 우리의 학우들이 유신독재에 의해 피를 흘리고 있다. 3·15 의거정신을 잊었는가, 나가자!”라는 격렬한 호소에 1,000여명의 학생들이 시위대를 형성했다. 부산과 마찬가지로 도심지로 진출한 경남대생과 마산대생들은 밤이 되자 시민들과 힘을 합쳐 공화당사, 파출소, 방송국을 부수는 등 격렬한 시위를 전개했다. 다음날인 19일 저녁 수출자유지역의 노동자와 고등학생들까지 합세해 시위가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될 조짐을 보이자 박정희는 20일을 기해 마산·창원에 위수령을 선포한다. 그리고 505명이 연행되고 59명이 재판에 회부되면서 마산항쟁도 막을 내린다.


이렇게 부마항쟁은 끝을 맺었지만 이제 누구의 눈에도 박정희와 유신독재의 몰락은 시간문제로 보였다. 청와대 경호실장 차지철이 “탱크로 한 2백만명쯤 깔아뭉개면 별일 없을 것”이라는 끔찍한 말을 태연자약하게 하는 동안 박정희의 몰락은 바로 옆에서 준비되고 있었다. 운명의 10월26일 중앙정보부장 김재규는 본인의 표현대로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향해 총을 쏘았고’, 그것으로 7년 유신체제와 18년 박정희 독재는 역사에 오점만을 남긴 채 끝을 맺었다.


-기획·집필에 참여한 사람-


유시춘(국가인권위 상임위원) 이우재(자유기고가) 김남일(소설가) 황인성(인권운동가) 정재돈(농민운동가) 한상봉(자유기고가) 김명인(문학평론가) 최민희(민언련 사무총장) 박노승(경향신문 논설위원) 김정섭(" 미디어부 기자)


경향신문 미디어부(02-3701-1156~8)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02-3709-7646)

출처 : [공식]♡귀농사모♡
글쓴이 : 디셈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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