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지리산둘레길

지리산길의 주요쉼터 유두류록의 화암 정비되다

지리산자연인 2009. 1. 23. 23:54

지리산길의 주요 쉼터 유두류록의'화암' 정비되다.
2008/12/13 오후 8:46 | ♦ 지리산 이야기

500년전 점필재 김종직선생의 지리산 기행문인 유두류록에 등장하는 쉼터 화암인 그 장소에 지리산길의 주요 쉼터가 될 예정이다.
사단법인 숲길에서 정비를 한 이곳은 많은 사람들이 앉을 수 있도록 멋진 평상을 만들어 놓았는데 그 앉을 자리도 느티나무 아래에 새로 담을 쌓아 올려서 그곳을 지점으로 하여 아주 넓게 평상을 만들었으며 그 모양도 주변과 잘 어우러지게 제작되어 인기있는 쉼터로 각광을 받으리라 여겨진다.

 함양군 휴천면 동강리 옛 당산터인 이곳은 1970년대 말까지 마을에서 당산제를 지냈던 곳이며, 소를 먹이러 가던 아이들의 쉼터였고 나뭇꾼들의 쉼터이기도 했는데 요즘은 사람들의 발길이 뜸한 곳이었다.

하지만 김종직 선생의 유두류록 탐구팀(jiri99, 대표 류정자)에 의해 김종직 선생의 유두류록 산행 코스가 거의 완벽하게 밝혀진 이후부터 지리산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로부터 주목을 받기 시작했으며, 사단법인 숲길에서 개척중인 지리산길의 주요 쉼터로 자리매김을 하게 되었으며 2009년 봄을 기다리고 있다. 사단법인 숲길에서 약 1주일 동안 동강 마을 당산터를 정비하여 아주 멋지게 평상까지 만들어 마을 사람들은 물론 지리산길을 찾는 사람들에게 시원하고 아름다운 쉼터로서의 그 역할이 기대된어진다.

이 당산터중 유독 주목을 받는 팽나무 한그루가 있는데 곧 경남도에서의 보호수로 지정될 예정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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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직의 유두류록[遊頭流錄]은 1472년(성종 3) 8월 14일- 8월 18일)에 지리산 산행을 한 기록문이다. 김종직 선생의 유 두류록 코스중 최근(지리 99 탐구산행팀, 대표 류정자)에 밝혀진 (화암)의 사진을 올려본다. 화암의 위치는 함양군 휴천면 동강리 마을 뒤 당산터이며 1962년에 진주의 촉석루를 중건하면서 기둥하나가 이 당산 나무중 한 그루였으며 현재 화암터인 동강마을 뒷산엔 거대하고 아주 오래된 팽나무 한그루가 아주 눈에 띄며 주변엔 크고 작은 느티나무가 마을 사람들의 쉼터 역할을 하고 있다. 나무가 죽으면 다시 그 자리에 또 다른나무가 자란다. 500년 전에 번성했던 나무로 추측이 되는 것은 당산나무중 한그루로 여겨지며 다른 나무들은 그 이후에 자란 나무일듯 하다. 김종직 선생의 유 두류록 번역문에서 화암(花巖)으로 기록된 부분을 발췌해 본다.



나는 영남(嶺南)에서 생장하였으니, 두류산은 바로 내 고향의 산이다. 그러나 남북으로 떠돌며 벼슬하면서 세속 일에 골몰하여 나이 이미 40이 되도록 아직껏 한번도 유람을 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신묘년(1471, 성종2) 봄에 함양 군수(咸陽郡守)가 되어 내려와 보니, 두류산이 바로 그 봉내(封內)에 있어 푸르게 우뚝 솟은 것을 눈만 쳐들면 바라볼 수가 있었으나, 흉년의 민사(民事)와 부서(簿書) 처리에 바빠서 거의 2년이 되도록 또 한번도 유람하지 못했다. 그리고 매양 유극기(兪克己), 임정숙(林貞叔)과 함께 이 일을 이야기하면서 마음 속에 항상 걸리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런데 금년 여름에 조태허(曺太虛)가 관동(關東)으로부터 나 있는 데로 와서 《예기(禮記)》를 읽고, 가을에는 장차 자기 집으로 돌아가려 하면서 이 산에 유람하기를 요구하였다. 그러자 나 또한 생각건대, 파리해짐이 날로 더함에 따라 다리의 힘도 더욱 쇠해가는 터이니, 금년에 유람하지 못하면 명년을 기약하기 어려운 실정이었다. 더구나 때는 중추(仲秋)라서 토우(土雨)가 이미 말끔하게 개었으니, 보름날 밤에 천왕봉(天王峯)에서 달을 완상하고, 닭이 울면 해돋는 모습을 구경하며, 다음날 아침에는 사방을 두루 관람한다면 일거에 여러 가지를 겸하여 얻을 수가 있으므로, 마침내 유람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리고는 극기를 초청하여 태허와 함께 《수친서(壽親書)》에 이른바 유산구(遊山具)를 상고하여, 그 휴대할 것을 거기에서 약간 증감(增減)하였다.

그리고 14일에 덕봉사(德峯寺)의 중 해공(解空)이 와서 그에게 향도(鄕導)를 하게 하였고, 또 한백원(韓百源)이 따라가기를 요청하였다.




마침내 그들과 함께 엄천(嚴川)을 지나

화암(花巖)에서 쉬는데,



중 법종(法宗)이 뒤따라오므로, 그 열력한 곳을 물어보니 험준함과 꼬불꼬불한 형세를 자못 자상하게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 또한 길을 인도하게 하여 지장사(地藏寺)에 이르니 갈림길이 나왔다. 여기서부터는 말[馬]에서 내려 짚신을 신고 지팡이를 짚고 오르는데, 숲과 구렁이 깊고 그윽하여 벌써 경치가 뛰어남을 깨닫게 되었다.

이상이 김종직 선생의 유두류록에 기록된 화암 관련 부분이다. 지장사는 함양독바위 아래 노장대 마을 부근에 그 흔적이 있으며 주민들의 구전으로, 탐구 산행팀의 현장확인을 거쳤으며 엄천(휴천면 남호리)에서 노장대의 지장사 가는 가장 빠른길은 동강- 구시락재- 거머리재- 한쟁이골- 감태박골- 진지박골- 지장사- 환희대- 선열암- 신열암- 고열암- 독녀암(함양독바위, 주변에 의론대, 미타암등이 있음)코스가 되고 엄천과 지장사 사이에 10여명과 말이 함께 쉴 수 있는 그늘진 곳의 쉼터는 동강마을 뒷쪽 당산터뿐이다.

화암의 근거는 바로 당산터 뒷산의 산봉우리 모양이 연꽃 봉오리 모양이며 옛날부터 꽃봉산이라 불리어졌으며 꽃花, 바위巖과 유추해 보아 화암(花巖)이 되며 상황적으로 완벽하게 연결되어진다.

김종직의 유두류록은 조선시대의 문인 김종직(金宗直)이 함양 고을의 원으로 있던 1492년 여름 두류산(현재의 지리산)을 유람하고 적은 기행문이며 목판본. 김종직의 저서 《점필재집》 권2에 수록되어 있다. 원래의 제목은 《유두류록(遊頭流錄)》인데 《동문선(東文選)》의 속편 권21에 《두류기행록》으로 되어 있다. 김종직은 부제(婦弟) 조위(曺偉)의 청으로 유호인(兪好仁) 등과 함께 14일부터 5일간의 일정으로 지리산 유람을 떠난다. 첫날 14일의 기록은 덕봉사(德蜂寺)의 승려 해공(解空)의 길안내로 유람길에 나서는 것으로 시작된다.

나중에 합세한 법종(法宗)에게서 들은 자세한 지리 설명과 지장사(地藏寺) 선열암(先涅庵)의 독녀바위에 얽힌 전설, 의론대(議論臺)의 유래 등에 대한 기록이 있다. 15일, 멀리서 바라본 의탄촌(義呑村)의 풍광은 가히 무릉도원이다. 영랑재까지의 가파른 산행, 소년대에서 목격한 농민생활의 곤궁, 성모묘에서의 산신제와 그곳에 얽힌 일화 등의 기록이 있다. 16일, 날씨가 좋지 못하여 주변의 풍광을 감상하면서 하루를 보낸다. 17일, 다시 성모묘에 가서 잔을 올리고 북루에 올라 주변 풍광을 감상한다. 중봉(中峰)의 경치, 저여원(沮汝原) 길에서 본 매 잡는 기구, 창불대(唱佛臺)의 경관, 각 골의 내력 등에 대한 기록이 있다. 그날 저녁에는 영신사(靈神寺)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다음날 일찍 하산한다. 말미에 두류산의 웅장함을 예찬하는 글이 있다. 고을 수령으로 있는 사람답게 도중에서 만난 백성들의 생활을 살펴보고 꼼꼼히 천착해 나가는 모습에서 목민관으로서의 정신을 엿볼 수 있는 기록이다.500년전 김종직 선생의 유두류록을 기록할 당시 지리산 산행에 동참을 했던 사람은 다음과 같다.

*유극기
함양 병곡 사람으로 극기는 자이며 이름은 호인(劉好仁)이고 당대의 뛰어난 시인이었다. 유호인 선생은 그가 낙향을 하려 하자 성종 임금의 특별한 총애를 받았고, <여지승람>의 편찬에도 참여하였던 유호인이란 신하가 늙은 어머니를 봉양하고자 벼슬을 내놓았을 때, 성종이 만류하여도 받아들이지 않아 석별의 연회를 베풀어 주면서 읊은 노래의 주인공으로 유명하다.

라는 시를 지었는데 해동가요에 전해 오고 있기도 하다.


*임정숙
정숙은 자이며 이름은 임대동(林大仝)이다. 현 휴천면 목현 사람으로 이후 김일손의 지리산 기행에도 동행을 했다.

*한백원
백원은 자이고 이름은 韓仁孝이다.

*조태허
태허는 그의 자이며 이름은 조위 曺偉이다.함양군수를 지내고 성균관 대사성 충청도 관찰사를 역임하였다.

*승려 해공
마천면 덕전리에 있었던 덕봉사의 승려로 추정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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