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책들보다 더 자신감 있고 동시에 더 절묘한 종류의 책은 없다. 그 책들의 여기 저기에는 지상에서 얻을 수 있는 최상의 것이 담겨 있다 : 냉소(cynicism)." - 니체, 『이 사람을 보라』(Ecce Homo, 1888)
베를린에서 막 개막한 연극들 중 한 편에서, 니체는 독일인 전체를 경멸하고 이탈리아와 미식(美食)을 사랑했던 기묘한 향락가(Epicurean figure)로 묘사됐다. 사진을 첨부한 전기(영어 번역본)가 최근 출판됐는데, 표지에 니체를 "훌륭한 유럽인"이라고 적어놓은 것이 이채롭다. 최근 니체를 집중적으로 다룬 BBC의 한 라디오 프로그램에 글을 기고한 전문 철학자들은 니체의 철학을 높게 평가하면서, 파시즘과 같은 독일의 반동적인 정치 운동과 니체 사이에는 어떤 공통 기반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터무니없는 것이라고 단언했다. 요즘 들어 니체의 저작들은 프랑스 대학들에서 중요하게 취급되고 있으며, "포스트모더니스트"들 다수는 니체를 19, 20세기의 가장 영향력 있는 철학자로 간주한다. 독일에서 니체의 사상은 영향력 있는 프랑크푸르트 학파(Frankfurt School of Social Research)가 전후 변화를 겪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니체가 20세기의 다양한 스펙트럼을 가진 정치 사상들의 호감을 사고 있다는 걸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니체의 죽음을 기리는 기념제를 맞아 그의 저작과 이력을 되돌아보고, 그의 저작이 현대 사상에 미치는 강력한 영향력을 미치는 이유를 생각해보게 된다. 세 부분으로 구성된 글의 첫 번째인 이번 글에서는 그의 사상과 인생이 어떻게 발전했는지를 짧게 검토할 것이다. 이후 두 글에서는 니체의 사상을 수용하는 좌우(左右) 지식인과 운동 진영을 다뤄볼 것이다. ● 니체의 생애 재능 있는 학생으로 여겨졌던 14세의 니체는 그 주에서 가장 좋은 학교에 학자금 면제로 진학할 수 있었다. 그 학교의 교장은 자유주의의 부활을 지지하는 자였는데, 그는 그것을 교양(Bildung : 개인의 성장을 장려하는 데 목적이 있는 교육)과 헤르더(Johann Gottfried Herder)와 같은 인물과 연관된 종류의 문화 민족주의의 결합으로 바라보았다. 니체는 고전 과목에서 탁월했고, 문학의 여러 흐름과 음악에 엄청난 관심을 보인다. 그가 처음 바그너(Richard Wagner)를 들은 건 1861년이지만, 당시 그가 제일 좋아한 작곡가는 슈만이었다. 20세의 니체는 본 대학에서 신학과 철학을 전공한다. 1865년 니체는 기독교에 대한 신앙을 잃었음을 공언하고, 공부를 그만둔다. 같은 해 그는 비관주의 철학자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The World as Will and Representation)의 한 판본을 입수한 뒤, 곧바로 쇼펜하우어 사상으로 개종했음을 공언한다. 같은 시기 동안 니체는 처음으로 정치에 직접적으로 관여한다. 그는 프러시아가 오스트리아와 전쟁을 하는 것에 처음에는 적의를 보였지만, 비스마르크가 오스트리아에 군사적 승리를 거두자, 1866년에는 곧바로 프러시아와 인접한 독일의 주들을 휩쓴 애국주의 물결에 합세한다. 니체는 비스마르크적 자유주의들의 소모임에 가입하는데, 그 그룹의 지도자인 트라이트쉬케(Heinrich von Treitschke)는 프러시아가 작소니 주를 병합할 것을 요구했다. 1868년 니체는 바그너를 처음으로 만나, 그 역시 쇼펜하우어에 열광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된다. 1869년 24세의 나이로 니체는 바젤 대학 고전철학 교수직에 임명돼 부설 문법 학교에서 그리스어 과목을 가르친다. 교수라는 위치 때문에 그는 독불 전쟁에 적극적으로 참전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휴가를 얻어 1870년 8월 11일 의무병으로 입대한다. 한 달도 안 돼, 참호 안에서의 끔찍함을 경험한 직후 그는 이질과 디프테리아에 걸려 바젤로 귀환 조치된다. 니체는 건강이 늘 안 좋았는데, 평생동안 극심한 시력 장애, 격렬한 두통, 주기적 쇠약에 시달렸다. 니체가 어른이 되어 만성적으로 병약하다 마지막으로 탈진하여 미치게 되는 지경에까지 이르는데, 그것이 학생 시절 매음굴에서 얻은 매독의 결과 때문이라는 걸 증명하는 의학 자료는 많다. 1871년 그는 건강상의 이유로 휴가를 내야만 했다. 그는 최초 저작을 저술하기 시작했는데, 출판된 그 책이 『비극의 탄생』(The Birth of Tragedy)이다. 1871년에 경험한 독일 통일은 니체에게 심각한 실망을 안겼다. 1870년대 말로 갈수록 점점 그리고 1880년대 내내 니체는 비스마르크의 기획에 환멸감을 거침없이 토해냈다. 우리가 볼 테지만, 동일 통일에 대한 환멸은 그의 후기작에서 가장 강렬하게 표현된다. 동시에, 1871년 니체는 프랑스의 변화를 예의 주시했다. 그는 처음 파리 코뮌(Paris Commune)의 등장에 낙담했고 노동자 계급의 혁명 같은 게 일어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너무도 경악했다. 편지에서 그는 코뮌 참가자(Communards)들이 결국에 유혈 진압됐다는 데 안도감을 생생하게 전하고 있다. 몇 년 후 1875년, 전체 독일노동자 연합이 그 유명한 고타 회의에서 사회민주노동당과 연합하여 새로운 맑스주의 정당인 사회민주당(SPD : the Social Democratic Party)을 창당한 뒤, 이후 몇 십 년간 독일 노동자들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1870년대와 80년대 독일에서 급속하게 진행된 계급들의 정치적 양분화는, 우리가 나중에 보게 되겠지만, 니체의 저작에 여실히 반영된다. 1874년 격렬한 말싸움 끝에, 니체는 바그너와 결별한다. 그는 또한 철학적 스승이었던 쇼펜하우어가 점점 더 불만족스럽다고 공표한다. 그 이후 니체의 건강은 급속히 나빠지는데, 그는 자신에게 처방된 여러 치료 방법과 관련하여 유럽을 여행한다. 그는 자신의 수많은 불만들이 쏟아지는 한, 계속해서 글을 썼다. 1879년 그는 건강상의 이유로 바젤 대학을 떠나는데, 이 때 받은 연금에 의지해 저술 활동을 계속한다. 다음 10년 동안 니체는 시달리는 병 때문에 끊임없는 좌절을 맞는다. 1889년 니체는 튀린 광장에서 주인에게 채찍질 당하고 있는 말을 구하고자 달려갔다가 쓰러져 버린다. 발작으로부터 회복됐지만 그는 더 이상 정상이 아니었고, 정신 장애자로서 그는 말년을 어머니와 누이의 보호 속에 보내게 된다. ● 사회적 그리고 정치적 배경 사실, 19세기 후반의 독일 정치의 변화상을 조사하지 않고서 니체의 작품과 발전을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1848년 그의 아버지가 죽기 1년 전이고 니체가 단 4살이었을 때, 유럽과 지금의 독일로 알려진 수많은 개별 국가들은 혁명을 겪고 있었다. 독일 동부의 벽지에 있었던 니체 가족이 그러한 사태를 인식하고 있었을 것 같지는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특히 독일에서와 같이 신흥 부르주아가 부상 중인 노동 계급의 급진성에 겁을 집어먹음으로써 1848년 혁명의 파고가 역전되고 만 일은 젊은 혁명가들 및 지식인들 세대에게 깊은 영향을 끼쳤다.(주2) 니체의 정신적 스승이었던 젊은 바그너는 1848년 반동 세력에 대항하여 바리케이드 위에서 싸웠지만, 결국 신비적 민족주의와 악독한 반유대주의를 수용하고 만다. 1848년은 부르주아의 열망에 종지부를 찍었을 뿐만 아니라, 구체제를 지탱해오던 교권과 종교의 심각한 붕괴를 초래했다. 프로테스탄트들에게 두드러졌던 이반(離叛 : disaffection)의 물결로 많은 사람들이 종교를 버렸다. 니체의 한 전기 작가는 당대의 신앙자들을 짓누르던 압력들에 대해 쓰고 있다 : "세속화의 위협으로 사람들은 뿌리를 잃었지만, 이는 그들을 종교적 정체성 대신 '신인류'(new men)의 최초인간이라는 대안적 정체성으로 이끌었다."(P. 베르크만, 『The Last Anti-Political German』) 그로부터 정확히 10년 뒤인 1860년대의 전반적 사회 분위기에 대해 기술하면서 프랑스 작가 뤼사(Charles de Rusat)는 "비관주의가 최근 파다하게 퍼졌다."라고 적고 있다. 그는 계속해서 3∼40년 전만 해도 혁명의 원리에 대해 희망과 열정에 부풀었던 많은 프랑스인들이 지금은 현대 민주주의가 "소란스러운 데카당스"(turbulent decadence)일뿐이라는 결론을 내렸다고 말한다. 독일에서는 쇼펜하우어(Alfred Schopenhauer)가 비관주의 철학을 가장 잘 대변하였던 인물이다. 헤겔의 철학과 맑스와 엥겔스의 유물론적 재구성을 거친 헤겔 철학을 향했던 사회의 급진화가 1848년 이후 그 심화되는 과정 속에서, 니체는 고전과 독일 낭만주의를 수학하고 1848년 이후의 정치적 정체에 낙담했던 독일 지식인 일파를 대표한다. 통일 독일의 성립이 가져온 결과들에 격렬히 반대하면서 니체는 점점 우파로 기울었고, 문화적 엘리트주의의 유독한 훈김, 독일 생철학(Lebensphilosophie)의 신비적 요소와 새롭게 부상하던 우생학이라는 의사(擬似)과학에 굴복했다.(주3) 니체는 연구하기가 까다로운 철학자로 유명하다. 독일 철학자 칼 야스퍼스(Karl Jaspers)는 니체가 "모든 것에 대해 두 가지 견해"를 가지고 있는 듯한 인상을 준다고 말한 적이 있다. 니체 저술을 읽으면서 발생하는 수많은 어려움은 니체 자신의 이데올로기의 필연적 산물이다. 그는 체계적인 학문의 사고보다 은유적 언명과 알레고리를 높이 샀고, 내용보다 "양식"(style)을 선호했다.(주4) 동시에 그의 저술에서는 분명한 발전이 추적된다. 생의 초·중반, 즉 1870년대 후반까지 니체는 주변에서 일어나는 의미심장한 사회적 변화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면서 작품 속에는 정신적 통찰력의 긴장감을 발견할 수 있다. 교회의 위선에 대한 격렬한 그의 공격과 당시의 문화적 격동에 관한 저술들은 이후 토마스 만(Thomas Mann)과 헤르만 헤세(Hermann Hesse)와 같은 저명한 독일 작가들에게 영향을 미친다. 그러나 1880년대가 시작할 즈음, 그리고 비스마르크의 독일에 대한 남은 희망을 완전히 포기할 즈음, 그의 저술은 대다수 인간들에 대한 원한과 경멸에 사로잡힌다. 그는 냉소주의의 사도로서 그의 생을 마친다. 예외가 없지 않지만, 니체 사상의 전개에는 매우 일관적인 핵심이 하나 있다. 수많은 입장에 관한 니체의 입장의 실타래들은 처음으로 출간된 『비극의 탄생』에서 이미 잘 드러나고 있다. ● 니체의 문화, 과학, 역사관 『비극의 탄생』의 의미를 1888년 회고하면서 그는 다음과 같이 썼다 : "예술과 진리의 관계가 내가 처음으로 숙고한 것이다. 심지어 오늘날조차 그것들의 대립은 나를 끔찍한 두려움에 떨게 한다. 나의 첫 번째 저작은 이 사실에 골몰했다. 『비극의 탄생』은, 우리가 진리 없이는 살 수 없다는 또 다른 신념의 배경 아래서 예술을 믿는 것이다. 진리를 알려는 의지는 이미 타락의 징후다."(니체 전집, 크로너, XIV, 3, p.239) 니체에게 있어, 예술은 진리의 가능성을 배제할 뿐만 아니라, 그래야만 한다 : "환영(illusion)에 기여하는 예술, 우리는 그것을 숭배한다."(같은 책, XII, p. 89) 동시에 그는 과학을 통해 진리를 탐색하는 것이 망상이라고 단언한다. 『비극의 탄생』에서 그는 본능의 힘과, 고대 그리스의 디오니소스와 연관된 신화 기술(記述)을 옹호한다. 니체는, 그가 합리적 사유와 "앎의 의지"(will to know)의 고전적 대표자라고 간주한 그리스 철학자 소크라테스에 이의를 제기한다 : "소크라테스라는 인물을 통해 심각한 망상이 세상으로 처음 들어왔다. 합리적 사고가 인과율을 따라 존재의 깊이를 꿰뚫을 수 있고 존재를 알뿐만 아니라 교정할 수 있다는 불변의 믿음 말이다. 이것은 터무니없는 형이상학적 환상이다." 유럽은 19세기 후반 과학과 생산 기술 영역에서 엄청난 발전을 거뒀다. 혁명적인 신 발명품들이 생산 형태를 변화시키고 있었다. 다윈의 진화론과 같은 이론과 물리학, 화학, 의학에서의 새로운 발견들이 오랜 시간 자리잡아온 태도와 편견을 무너뜨리고 있었다. 니체는 『반시대적 고찰』(Untimely Meditations, 1874)이라는 논문집에서, 과학이 삶을 개선시킬 것이라는 확신을 가졌던 당대 사회의 전반적 분위기에 대해 적고 있다 : "진실로, 지금 '과학이 삶을 지배할 것이라'는 환성이 나오고 있다. 그러한 상황이 아마도 올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지배되는 삶이 가치 있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 삶은, 지식이 아닌 본능과 강렬한 환상의 지배를 받는 이전 삶보다 훨씬 덜 생기 있을 테고, 미래를 훨씬 덜 보장할 것이기 때문이다." 니체에 따르면, 과학의 흠은, 신화와 환상에 대한 인간의 근본적 충동과 욕구를 허락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본능은 여하한 과학적 방법보다 훨씬 강렬하다. 『반시대적 고찰』의 「삶에 대한 역사의 공과(功過)에 대하여」(On the Uses and Disadvantages of History for Life)에서 니체는 또한, 누구보다 헤겔이라는 이름과 관련된 역사 연구의 강력한 전통에 반대한다. 역사에 대한 일관된 체계적 접근을 세우기 위한 헤겔의 노력을 공격하면서, 니체는 "역사의 힘에 대한 찬양은 사실상, 모든 순간을 성공에 대한 적나라한 감탄으로 바꾸고 사실(the factual)에 대한 맹종을 낳는다"고 반대 주장을 편다. 세 번째 글에서 보겠지만, 20세기 후반의 프랑스 이론가들(후기구조주의자들과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은 헤겔과 역사에 대한 니체의 적의를 각별히 이용했다. ● 문화적 엘리트주의 1871년, 파리 코뮌의 위험에 격노하고 독일 사회민주주의의 성장에 당황한 그는, 보통 교육은 공산주의를 낳을 수 있다고 경고했다 : "문화의 보급은 분명 공산주의의 전 단계다. 이런 식으로, 문화는 특권을 더 이상 줄 수 없을 정도로 쇠약해 간다. 문화를 가장 널리 보급하는 것, 즉 야만주의는 정말로 공산주의의 예비 조건이다. 일반화된 문화는 진정한 문화에 대한 증오로 모습을 바꾼다."(『반시대적 고찰』) 후기작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1883∼84)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 "모든 사람들이 충분히 읽을 수 있도록 배울 수 있게 되면, 글쓰기뿐만 아니라 생각하기도 망치게 된다." 니체에게 있어, 공산주의와 대중에 문화를 보급하는 것은 문화의 종말을 의미했다. 예술의 보호를 위해 그가 옹호한 사회 질서는 일종의 노예제 사회였다 : "예술의 발전을 위한 넓고, 깊고, 비옥한 토양을 위해서, 대다수의 사람은 소수에게 봉사하며, 그들의 결점이 요구하는 상당한 정도로 생존 경쟁에 노예처럼 매달려야만 한다."(『그리스 국가에 대한 글들』) ● 니체의 정치관과 사회관 『방랑자와 그의 그림자』(The Wanderer and his Shadow, 1880)의 한 구절에서 니체는 명백하게, 누진세의 한 형태로서 이해한 사회주의라는 골칫덩어리를 떨쳐내려는 개량주의적 공상 뒤로 물러서 거들먹거린다 : "사회주의는 재산의 취득을 폐지하려는 주의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재산으로부터 최대한 소외된다. 그들이 국회에서의 다수로 징세권을 차지하기만 한다면, 누진세로 자본가 , 상인, 영주들을 공격하고 중산 계급을 천천히 창조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은, 회복하면 병을 잊듯이 사회주의를 잊게 될 것이다." 비스마르크는 전통적으로 당근과 채찍(Zuckerbrot und Peitsche)을 실용적으로 결합한 정치가로 유명하다. 니체는 비스마르크의 당근(그는 대중에 양보하여 민주주의적 감정을 고취했다)과 신흥 독일 자본가 계급의 뻔뻔스러운 탐욕에 낙담했다. 니체는 자본이라는 새로운 몰록(Moloch : 아이들을 희생양으로 바쳐 섬기는 신)인 자본에 문화가 종속되는 것을 한탄했다 : "교양 계급과 제국이 지극히 한심한 돈의 경제에 의해 휩쓸리고 있다. … 요즘은 가장 천박하고 악한 힘, 화폐 발행인과 군사 독재자의 이기주의가 지상의 거의 모든 것을 좌지우지하고 있다."(『반시대적 고찰』) 최후 저작의 주석에서 니체는, 한편으로는 사회주의의 위협에 대한, 다른 한 편으로는 부의 단순한 취득에 기초한 사회에 대한 대안을 고안하고 있다. 그는 귀족적인 통치 엘리트의 지배를 보증하는 엄격한 서열 제도의 도입을 요구한다. 그가 가장 좋아한 사회 질서는 노예제였다. "보통 선거의, 즉 모든 사람이 모든 사람과 모든 사건을 판단하는 자리에 앉을 수 있는 시대에, 나는 서열 제도를 재구축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 그리스인들이 노예제 때문에 멸망한 것이 사실이지만, 우리가 노예가 더 이상 없어서 멸망할 것이라는 점은 더욱 확실하다. … 중세 시대의 농노, 그와 영주를 이어줬던 건강하고 섬세한 법적·도덕적 관계들, 구속된 존재라는 느낌으로 충만한 궁핍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지극한 안심을 느끼게 된다."(『권력에의 의지』(The Will to Power, 1888)에 대한 주석) 그리고 같은 취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 "노예제는 폐지돼선 안 된다. 그것은 필수 불가결하다. 우리는 사람들이 자신들이 봉사할 사람들을 위해 나오도록 신경 쓰기만 하면 된다." 제 정신이 아니었던 최후의 5년 간 니체가 쓴 글들은 일반 대중에 대한 경멸, 평등과 "열등한" 인간에 대한 맬더스와 같은 비난, 군국주의와 전쟁의 미덕에 대한 찬가, "새로운 인간"(초인, Ubermensch)에 대한 옹호로 가득 차 있다. 니체에 따르면 노예제와 착취는 사태의 자연적 상태와 부합한다 : "증오, 다른 사람의 불행에 대한 악의적인 즐거움, 탈취욕, 지배욕, 악으로 불리는 모든 것은 종(種)의 보존에 관한 가장 놀라운 경제학에 속한다."(『즐거운 과학』(The Gay Science, 1882)) 니체는 "폭도"(rabble)라고 그가 부른 대다수 사람들에 대해 경멸만을 품었다.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한 장은 "폭도"에게 할애되고 있는데, 그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 "삶은 기쁨의 분수다. 그러나 폭도가 물을 마시면, 모든 샘에 독이 퍼진다."(「폭도에 관해」) 니체의 저작에 관한 이 짧은 논평을 통해, 그의 사상의 주요 요소와 그것들이 반영하는 특별한 이해(利害)들을 구별하는 것이 가능하다. 두 영혼이 그의 가슴 안에서 충돌하는 것 같다 : 하나는 사회의 진보적 발전, 과학, 지식의 보급에 완전히 좌절한 쁘띠 부르주아 예술가(Kunstler : 니체는 직접 작곡을 했지만, 대단한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다. 그 예술가는 "정지"라고 외치지만, 결국 철저히 엘리트주의적이고, 환상, 신화, 본능에 기초한 문화적 대안을 제시하고 만다. 다른 하나는, "야비한 화폐 경제"에 대해 비난하고 엄격한 위계에 기반을 둔 사회를 옹호하는 니체. 그는 독일 융커(Junker : 자신들의 전통적 지반이 새로운 사회 질서의 위협을 받고 있다고 본 봉건 귀족 계급)의 이해를 너무도 분명하게 표명하고 있다. I cry: ‘Ecrasez L'infame!' 니체가 혁명을 불신하고 노동자 계급을 두려워 한 것은, 그의 급진주의가 탐욕스런 독일 신흥 부르주아 계급에게 위협이 될 수 없었음을 의미한다. 독일 부르주아는 19세기 말미의 제국주의적 확장을 위한 그들의 계획을 정당화하기 위해, 전쟁을 옹호하는 니체의 군국주의적인 면이면 뭐든지 교묘하게 조작할 수 있었다. 투기와 금융 시장의 확대에 관심이 있던 중간 계급의 새로운 계층 또한 니체의 "삶의 철학"을 자신들의 것이라 주장할 수 있었다 : "삶 자체는 본질적으로 전유(專有), 권리 침해, 타자와 약자에 대한 강압이다. 억압, 가혹, 자기 자신의 형태를 강요하는 것, 합병, 그리고 적어도 착취다."(『선악을 넘어』(Beyond Good and Evil, 1886)(주6) 역사의 시계 방향을 바꾸려는 니체의 확고한 이데올로기적 선전은 이후 세기에서 강력한 반향을 울리게 됐다. 다음 두 개의 글에서 우리는 20세기의 극히 다양한 사회 세력과 운동들이 니체의 사상의 여러 측면들을 자신들의 아젠다로 어떻게 끌어쓸 수 있었는지를 살펴볼 것이다. - 니체에 대한 재평가 (中) 으로 이어짐 - ○ 미주 1. 니체의 가정 환경은 니체를 계속 괴롭혔던 여자와의 관계를 지적해준다. 그는 구혼을 했다가 거절당한 경험이 일생에 두 번 있다. 니체뿐만 아니라 쇼펜하우어(Schopenhauer)의 작품에는 극도의 여성 비하적 표현이 있다. 훌륭한 독일 맑시스트였던 메링(Franz Mehring)은, 쇼펜하우어에 관한 그의 유명한 논문에서 비관주의 철학자인 쇼펜하우어가 「여성에 관해」(On Women)에서 어떻게 여성을 개미에 비유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니체의 경우, 여성을 암소의 무리에 집어넣곤 한다.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Thus Spake Zarathustra)의 「젊은 여성과 늙은 여성에 관해」(Of Young and Old Women)도 참고할 것. 2. 1848년 당시 독일 급진주의자들의 결단력 없는 작태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은, 프리드리히 엥겔스의 「독일에서의 혁명과 반혁명」(Germany: Revolution and Counterrevolution)을 참조할 것. 3. 루카치(Georg Lukacs)의 『이성의 파괴』(The Destruction of Reason, 1946)는 그 약점에도 불구하고, 19세기 독일의 "비합리적 철학"에 관한 최상의 역사적 접근으로 남아있다. 이론가로서의 루카치는 스탈린 치하의 소련 안에서 활동한 대부분의 지식인들 중 군계일학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성의 파괴』의 많은 부분에서 스탈린주의 정통 교리 안에 놓여 있다. 책의 첫 장에서 그는 스탈린의 눈에 거슬리는 선전문구에 의지해, 어느 부분에서 사회주의를 "의식적인 국민적 삶과 문화"를 고취하는 체제라고 찬양하고 있다. 책의 다른 곳에서는 루카치는 "비합리주의"를 너무 넓게 잡고 있다. 루카치에 따르면, 진보적인 부르주아 철학이면 어떤 것이든 니체로 끝나기 마련이었던 것이다. 그 결과 루카치는 듀이(John Dewey)와 같은 미국 실용주의 철학자의 진보적·민주적 요소조차 "비합리주의"라는 그의 일반적 항목에 집어넣기조차 한다. 4. 니체 사상의 절충주의적 요소를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 글의 세 번째 파트에서 언급될 애쉬하임(Stephen Aschheim)이라는 작가는 그의 책에서, 20세기에 들어 니체의 사상에 기초한 관련 사상들이 형성됨을 지적한다. 무엇보다, 페미니즘(주1을 보라), 종교 조직(주5를 보라), 심지어 채식주의!까지 옹호하는 사상들이 말이다. 5. 니체는 "신의 죽음"을 선포한 전투적 무신론자라고 자주 묘사되곤 한다. 니체의 종교 비판은 과학적이거나
유물론적 입장이 아니다. 그는 세속주의의 유포에 불평을 자주 터뜨리곤 했다. 우리가 보았다시피 그는 일관되게 신화와 환상의 역할을 옹호했다.
사실, 그가 기독교의 위선을 비판하는 수많은 글에서 그가 가시 돋친 말을 퍼붓는 건 바로 기독교의 민주주의적 요소다. 어떤 부분에서 니체는
엄격한 카스트와 위계 제도를 갖춘 인도 종교의 몇몇 형태들을 좋게 말하고 있다. |
번역: 요한보스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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