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지

마장터3

지리산자연인 2006. 12. 30. 15:15


달빛과 더불어 오르는 마장터

마장(馬場)터 초입, 아차 싶다. 운동화를 준비할 것을. 제법 굽이 있는 단화 한 번 내려다보고, 제법 험한 길 한 번 보기를 여러 번. 게다가 밤이다. 이럴 땐 앞뒤 재 보지 않는 것이 상책이다. 예전 사람들은 짚신 신고 다녔을 길이 아닌가. 그 생각을 하니 못 오를 것도 없다는 계산이 선다. 완전히 배짱이다. 넘어지고 깨지고 미끄러지고 할 테면 해라.
그런데 걱정 하나를 덜어 내고 나니 또 하나의 걱정이 남는다. 지금 마장터에 사람이 있을까 하는. 겨울이면 그나마 마장터를 지키고 있는 한두 사람도 산 아래로 내려와 지내기 때문이다. 건어물과 특산물을 파는 인근 상점 주인이 혹시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한 말에 희망을 걸어 볼 뿐이다.
어쨌든 이래저래 걱정스러운 길을 오르게 되었는데 생각보다 길이 너그러워 한시름 놓는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다. 억새가 우거진 묵정밭을 지나면서 또 한 번 아차 싶다. 골짜기를 휘감는 차가운 바람도 바람이려니와 마장터로 이어지는 ‘물굽이계곡’이 시작되면서 난감해진다.
진부령에서 내려오는 계곡과 합수되는 물굽이계곡 양쪽으로 난 길이 하나로 이어지는 듯 헷갈리게 나누어져 있고, 계곡의 살얼음 위로 오래된 낙엽이 뒤덮고 있어 한 발 한 발 떼기가 쉽지 않다. 잘못 디뎠다가는 낙엽 속에 묻힌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고, 보폭을 조금이라도 넓히려고 하면 가차없이 미끄러져 여기저기 처박히기 일쑤다.
그 모습에 사진 기자는 몹시 황당해한다. 이렇게 쉬운 산길도 제대로 못 오르느냐는 것이다. 그 말에 나 또한 당황스러워진다. 산길에 익숙한 사람이야 한달음에 오를 길이겠지만, 산길에 익숙하지 못한 나 같은 사람에게는 어디 쉬운 길인가 말이다. 오르는 내내 그것을 문제삼아 옥신각신 작은 말다툼이 이어진다. 그러는 사이 좀더 가파른 오르막으로 접어든다. 소간령이다. 반쯤 오른 셈이다.
소간령을 넘으니 일본이깔나무인 낙엽송이 나타난다. 이 낙엽송이 시작되는 곳부터를 ‘마장터’라 이른다. 화전 정리를 하며 심었다는 낙엽송은 하늘로 곧게 쭉쭉 뻗어 있다. 그 높은 가지 위로 휘영청 밝은 달이 님의 얼굴처럼 가슴 설레게 걸려서는 쳐다보고 또 쳐다보게 한다.
그 사이로 아름다운 오솔길이 모습을 드러낸다. 욕심 사납게도 그 길을 감춰 놓고 혼자만 거닐고 싶어진다. 마음 비우려 떠난 길에서 이건 또 무슨 욕심이고 소유욕인지… . 떠나고 또 떠날 일이다.



귀틀집에 깃든 자연의 순리

낙엽송이 끝나는 지점에 이르자 하얀 달빛 아래 귀틀집 세 채가 그림처럼 놓여 있다. 귀틀집은 억새 밑에 굴피를 깐 것으로 통나무를 귀가 어긋나도록 우물 정(井)자 형태로 쌓고, 그 사이사이에 진흙을 발라 벽체를 만든 집이다. 귀틀집을 옛스럽고 정겨워 ‘깃들집’으로 발음하는 이들도 있다. 뭔가 다정한 것이 깃들 것만 같다는 따뜻한 느낌에서다.
그 귀틀집 굴뚝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창호지 문 가득 어스름 불빛이 스며 있다. 도란도란 말소리도 들린다. 문득 따뜻한 차 한 잔이 생각나면서 반갑다. 그러나 가장 먼저 길손을 반긴 것은 뜻밖에도 잡종인 듯한 개 한 마리다. 꼬리치며 쪼르르 달려오는 모습에서 깊은 산중의 그리움이 묻어난다.
녀석과 함께 도란도란 말소리가 들리는 귀틀집으로 발걸음을 옮기는데, 오른편 귀틀집 눈꼽재기창(여닫이 옆에 작은 창을 내어 문을 열지 않고도 밖을 내다볼 수 있게 만든 창)에서 비추는 은은한 불빛이 마음을 사로잡는다. 인기척이 들렸는지 주인이 문을 열고 살며시 내다본다. 그림이 따로 없다. 마치 사각 액자에 담겨진 인물화 같다. 떠돌이 생활을 하다 서른다섯에 마장터 사람이 되었다는 정준기(60) 씨다. 정준기 씨 귀틀집은 특이하게도 소나무를 깎아 만든 문패가 걸려 있다. 철 따라 약초꾼, 나물꾼, 뱀꾼으로 살아가고 있는 정준기 씨는 백두대간을 오가는 등산객의 좋은 벗이다. 처음 보는 길손을 경계심 없이 반기는 것은 이 때문이다.
네 사람이 반듯하게 누우면 꽉 찰 만한 크기의 정준기 씨의 방은 소박함과 빈곤함이 동시에 들어 있다. 벽에는 옷가지와 외동딸이 초등학교 때 불었다는 피리가, 얼기설기 짠 시렁 위에 라면 상자 몇 개와 살림에 필요한 갖가지 생활 용품이, 구석에 자리잡은 작은 상 위에는 오래된 트랜지스터 라디오와 촛대가 놓여 있다. 낡은 책상보가 덮인 사각 상자 위에는 누가 쓰다 버렸다는 신발장이 찬장 구실을 하고 있다. 그리고 그 찬장 유리면에는 손녀 보은이가 갓 태어났을 때와 걸음마를 떼기 시작할 무렵의 사진 두 장이 붙어 있다. 간혹 밀려드는 산중 생활의 외로움과 노곤함을 정준기 씨는 손녀 얼굴로 달래는 듯하다.

“이 밤에 예까지 올라오느라 고생 많았겠수. 식구들이 있는 속초에 잠시 다녀올까 하다 며칠 미뤘는데 참 잘했네 그래. 허기사 저기 배 씨 어른네에 사람이 있기는 하지만서두. 지금은 배 씨 어른 대신 외국서 살다 온 아들이 와서 기거하고 있지. 얼마 전에 젊은 처자 셋이 이곳에서 한 달 정도 나겠다며 찾아왔지 뭔가. 그래서 배 씨 어른 집에 묵기로 한 모양이야. 그래서 이곳 마장터에 사람 냄새가 좀 난다네.”
정준기 씨 말에 따르면 귀틀집 세 채 중 김 포수가 살던 곳만 비어 있을 뿐 마장터에는 아직도 사람들이 깃든다고 한다. 아마도 백두대간을 동서로 이어 주는 지역의 특성 때문이리라. 마장터라는 이름이 원통장으로 가던 마꾼들이 잠시 머물던 곳에서 연유된 것이고 보면, 깃듦의 요충지인 것만은 분명하다. 마장터가 한창 번잡할 때는 인근 산골 사람들이 마꾼들에게서 물건을 구하려고 해서 수시로 장이 서고, 땅이 기름져 봄이면 좋은 종자를 구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줄을 이어 몰려들었다고 한다. 등산객이나 약초꾼들이 간혹 발걸음을 하는 지금을 생각할 때 그 때를 떠올리기란 쉽지 않지만 말이다.
“나는 예서 사는 게 좋아. 걱정거리가 없거든. 날 밝으면 나가서 열심히 일하고, 어두워지면 따뜻한 아랫목에 누워 이런 생각 저런 생각 하다 자고. 더 이상 바랄 게 뭐가 있나. 욕심을 비우고 나면 마음이 편해지거든. 그런데 대처로 나가면 어디 그렇게 되는가 말이야 허허허.”
젊은 시절 먹고 살 길이 막막해 찾았던 마장터에서 이젠 도인 같은 삶을 살고 있는 정준기 씨다. 봄이면 복주머니꽃, 백선, 깽깽이풀꽃 같은 소박한 꽃들에게서, 여름이면 시원한 계곡의 물 소리와 청정한 산에게서, 가을이면 곱게 물든 단풍에게서, 겨울이면 하얗게 내린 눈에게서 자연의 순리를 깨달으며, 그 순리대로 살아온 인생이기 때문에 가능하리라. 한 해의 끝자락, 뭔가 하나는 깨달은 듯하여 아쉬움이 덜하다. 마장터에 오른 까닭이다.



마장터 가는 길과 여행 정보


아직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마장터는 미시령 초입에서 시작되는 서쪽 들머리에서 한 시간 거리인 작은 샛령 너머에 있다. 70년대 초반 독가촌 정리 사업 때 사람들을 내보내고 심었다는 낙엽송이 빽빽하게 시야를 가리는 곳부터가 마장터다. 현재 마장터에는 마꾼들이 쉬었다는 주막터와 마방과 귀틀집이 세 채 있다. 요즘 마장터를 오가는 사람은 약초꾼이나 미시령을 경계로 설악산(1708m)북쪽에 있는 산 신선봉(1204m)을 오가는 등산객들 뿐이다. 마장터 계곡은 굴곡 없이 펑퍼짐한 듯 편안해 보이나 가을과 겨울은 조심해서 다녀야 한다. 때문에 백두대간을 오르지 않더라도 준비를 든든하게 해 두는 것이 좋다. 밤길을 이용할 때는 반드시 헤드랜턴을 챙겨야 하지만, 맑은 날에는 달빛이 좋은 길 안내자가 되어 준다. 매우 낭만어린 산행이 될 것이다. 만약 시간이 허락한다면 신선봉까지 올라 보는 것도 괜찮을 일이다. 신선봉에 오르면 마장터가 한눈에 보이는데 귀틀집 세 체가 그림처럼 아름답다.

마장터 가는 길
양평-홍천-인제-원통-미시령을 거쳐 용대리로 접어들면 된다. 건어물과 특산물 상점이 두 개 나오면 그 곳에 주차를 하고, 앞에 보이는 군부대와 개울을 건너 얌전히 나 있는 좁은 길을 따라 오른다. 묵정밭과 소간령을 지나면 두 갈래의 길이 나오는데 이 때 오른쪽 길을 따라 가면 된다.



글_손미경    사진_이한구
글쓴이는 따뜻한 사람을 만나 글을 쓸 때 행복하다는 자유기고가이며
사진작가는 사람과 자연을 주로 카메라에 담아 내는 프리랜서다







▲ 마장터로 향하는 길, 진부령에서 내려오는 계곡과 합수되는 물굽이 계곡이 시작되면서 산길은 험해진다.


▲ 멀리 설악산 능선이 보인다. 그 능선 한 곳에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마장터가 있다.


▲ 서른 다섯에 마장터 사람이 되었다는 정준기 씨가 눈꼽재기창으로 객을 반긴다.












▲ 촌스러워 보이는 옛 물건으로 가득한 정준기 씨의 방이 재미있다.


▲ 마장터로 가는 길, 화전 정리를 하며 심었다는 낙엽송이 하늘로 곧게 쭉쭉 뻗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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