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지

법수치 손이연씨

지리산자연인 2006. 1. 2. 00:27
깊은 계곡 물 소리가 이슥한 밤 기운을 희롱하는 한여름 밤이다. 잠자리에서 뒤척이다 물가에 나와 앉아 본다.

물속에 잠긴 달빛 풍경에 푹 빠져들고 싶다. 달을 따기 위해 물속에 뛰어든 이태백의 심정이랄까.

나도 모르게 물에 담가버린 발이 시리다. 달처럼 잠이 저만치 달아나 버린다. 청량한 바람 소리만 짙은 어둠의 적막을 휘저을 뿐이다.

산이 내것이요 내가 산이 되는 시간이다. 세상사람들이 이 맛을 알랴마는 나만의 깊은 창고에 그 맛을 쌓아 놓으리라.

강원 양양 응복산 자락의 산사람 손이연(46)씨. 그가 법수치계곡을 거슬러올라 나무집을 짓고 산장지기가 된 지도 벌써 9년 세월이 흘렀다. 어린 시절 만화 속 산도사에게 이끌려 산에 들어가 무술을 익히는 것이 꿈이었던 그에겐 어쩌면 당연한 종착점인지도 모른다. 산도사에게서 무공을 익힌 후에 세상에 나와 뭔가를 보여주고 싶은 어린 마음이 산과의 인연을 가꿔 간 셈이다.

제주도가 고향인 그는 성년이 되어서도 ‘산 병’에 시달렸다. 내림굿을 할 수밖에 없는 무병(巫病)에 걸린 처자처럼. 직장 생활 중에도 홀연히 몇 달씩 산속으로 사라졌다. 10여년 새 여덟 번을 직장에서 잘리고 새 직장을 구하는 악순환이 반복됐다. 이해할 수 없는 주위 친구들과 직장 동료들은 미쳤다고 했다. 내가 느낀 그 세계를 영원히 내 마음속에 간직하리라 자위할 수밖에 없었다. 이 맛을 모르는 그들이 왠지 불쌍하다는 생각에 나도 모르게 어느 순간 눈물이 주룩 흘렀다.

지리산 화엄사에서 노고단에 이르는 10㎞ 코스를 무거운 배낭을 메고 올라 정상에서 더덕을 안주 삼아 소주 한잔을 기울이니 이것이 참다운 삶이었다. 돈과 명예, 권력은 물론 조직 생활의 시기와 질투가 부질없어 보였다. 옛 도인들이 이 맛에 산속에서 솔잎 먹고 살지 않았는가.

산을 내려와 한 주도 안 되어 이런 생각들은 세파에 소진됐다. 몇 개월을 버티지만 다시 떠나고 싶은 마음에 견딜 수가 없었다. 어느해 5월 철쭉제 무렵 가까운 한라산을 택했다. 물이 없는 성판악 코스로 올랐다. 땀에 젖은 몸을 백록담에 박고 물을 들이켰다. 풀밭에 누우니 황홀경이요, 날아갈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인간의 갈증이란 이렇게도 간사한 것이란 말인가.

내친김에 강원 산속으로 들어갔다. 점봉산 설피마을에선 풋풋한 정에 반해 시골 노인들의 얼굴을 카메라에 담았다. 인제에서 양양으로 넘어가는 조침령을 오를 땐 억수 같은 소나기가 시야를 가렸다. 정상에 도착하니 비는 그치고 발아래가 구름바다였다. 무릉도원의 착각에 빠져 구름 속으로 뛰어내리고 싶은 충동을 가까스로 부여잡았다.

이곳 어디쯤에 터를 잡을 후일을 기약하며 세상 속으로 다시 나왔다. 언제든 떠나고 싶을 때 떠날 수 있게 아예 관광회사를 하나 차렸다. 하지만 오히려 그것이 멍에가 됐다. 이게 아니다 싶었던 차에 부도가 났다. 2년간 백수 생활에 술과 카메라로 위안을 삼았다. 이 즈음 아내 김영희(41)씨를 만난다. 산에 들어가 5년만 열심히 생활하면 터전이 잡힐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반대하는 아내와 딸을 두고 막상 떠나려니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사흘을 고민했다. 노후에 밥 굶지 않고 20∼30년 후에도 오염되지 않은 물을 마실 수 있는 곳이면 더 이상 바랄 게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1997년 봄 홀로 법수치계곡 자락에 둥지를 틀었다. 화전민이 살던 폐가를 수리해 거처로 삼았다. 지리산 청학동에서 황토흙을 가져다 벽을 바르고 방구들을 놓았다. 한여름 화장실 구덩이를 한창 파고 있는데 가족단위 피서객들이 눈에 들어왔다. 집에 두고 온 가족 생각이 났다. 내가 천년만년 살려고 이 고생 하나 하는 서글픈 생각이 들었다. 여름이 지나고 찬바람이 나니 괜스레 마음을 다잡기가 힘들어졌다. 잡사를 잊기 위해 일에 몰두했다. 초가을에 집수리를 서둘러 끝내고 겨울나기 준비에 들어갔다.

밭에서 배추를 뽑아 김장김치도 담그고, 눈이 많은 겨울나기라 땔감 1년치와 쌀 한 가마를 장만했다. 돼지 뒷다리를 하나 사와 처마에 걸어 놓으니 세상 부러울 것이 없었다.

아궁이에 불을 지펴 알불이 생기면 칼로 고기 한 덩어리를 잘라다 굽고, 소주 한잔에 밥 한숱가락을 곁들이니 산속에 사는 재미가 쏠쏠해졌다. 되돌아보니 그해 겨울이 가장 행복했다.

산생활 1년이 지나자 아내가 합류하겠다고 제주서 올라왔다. 계곡물 건너편에 터를 잡아 손수 집을 짓기 시작했다. 산에서 살겠다는 각오로 산에 미쳐 다닐 때도 오가다 마주치는 절 공사나 한옥 짓는 곳이 있으면 밥만 얻어먹고 한두 달씩 지내며 목조건축 일을 배웠다. 산에서 만난 산친구들의 집을 공짜로 지워주며 실습했다. 산에서 살려면 내 손으로 집을 지을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서다.

또 하나는 생계다. 산에선 약초를 캐서 차와 발효액을 만들면 끼니는 해결된다는 것을 산을 돌아다니면서 알게 됐다. 산은 자신의 품안에 앉긴 사람들은 먹여살린다 하지 않던가. 틈틈이 약초꾼을 따라다니며 약초를 배운 것도 산 생활을 위한 준비였다. 몸에 좋다는 100가지 풀로 만든 백초효소와 100가지 꽃으로 만든 백화주도 만들어 보았다.

혼자 집을 지으니 3년이 걸려 겨우 공사가 끝났다. 여름철 피서객들이 집이 예쁘다며 찾아왔다. 자고 가겠다는 사람들이 한둘 생기고 산약초 효소를 대접하니 입소문으로 산약초 산장으로 자연스럽게 불리게 됐다.

그는 집은 산처럼 사람을 편하게 해줘야 한다고 말한다. 명산처럼 밖에서 보면 들어가고 싶고, 들어가서면 쉬고 싶은 그런 집이다.

터도 잠시 머물러 보면 정신이 맑아지고 기분이 상쾌해지는 곳이 적격지란다. 흔히 말해 기(氣)가 좋은 곳이다. 대부분 능선 자락에 이런 곳이 많다는 것이 그가 산에서 저절로 터득한 지혜다. 풍수학 이론과도 일치하고 있다. 능선을 타면 나도 모르게 콧노래가 나오는 것도 좋은 기 때문이란 것이 그의 생각이다. 음기가 강한 곳은 잠시 스쳐도 머리가 쭈뼛해지는 것을 산에 다니면서 알게 됐다.

산장의 방들엔 산약초 이름이 붙여졌다. 머루방 다래방 인동꽃 산딸기 솔잎방 오디방 등.약초처럼 집도 머무르는 이의 건강을 지켜줘야 한다는 믿음에서다. 방마다 천장 보를 걸고 서까래로 삼각골을 만든 것도 좋은 기를 모으기 위해서다. 피리미드 원리에서 힌트를 얻었다. 종교건축처럼 창도 세로로 긴 것이 좋은 기를 만든다고. 원활한 기를 받으려면 둥근 창이 제격이란다. 꽃잎은 닮은 산장 거실의 타원형 창도 구부러진 나뭇가지를 그대로 이용해 만들었다. 바가지를 엎어 놓은 듯한 초가집은 그 원형이라는 것.

그는 요즘 건강치 못한 이들을 위한 집을 구상 중이다. 돈 되는 일은 아니지만 산장에서 걸어서 한 시간 거리에 있는 옛 광불사 자리에 휴양 산장을 계획하고 있다. 몸이 안 좋을 때마다 그곳에 가 잠시 머물면서 몸이 개운해지는 것을 경험했다. 산을 떠돌던 시절 갑자기 그곳에 이르렀을 때 기의 혈처럼 머리가 열리고 기분이 좋아지는 것을 체험하면서 점찍어 놓은 장소다. 봄가을에 산에서 나는 약초 나물과 버섯 등을 먹으며 아픈 이들이 쉬어 갈 수 있는 산장이다.

산 같은 건강한 집을 짓겠다는 그의 관심은 끝간데없다. 건강한 구들방 연구를 위해 신라 때 만들었다는 지리산 칠불사 아자방의 구들방 자료를 수소문해 복원하고 있다. 한번 불을 때면 100일 동안 방 안이 온기를 품고 있었다는 아자방은 방고래를 가로 세로 각 8m 크기의 버금 아(亞)자 모양으로 만들어 그 위에 구들을 얹었다는 데서 유래한다. 숯과 강회를 각각 20㎝ 두께로 깔고 그 위에 구들을 놓았다. 숯이 습기를 차단하고 강회가 열을 차단하는 이중구조를 알아냈다. 법수치계곡에서 딸 하나를 더 얻어 두 딸의 아빠가 된 손씨는 산속의 계곡물처럼 자신의 삶을 유용하게 흘려보내고 싶다고 말한다. 그가 산에서 배운 아름다운 삶이다.

wansik@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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