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눈을 어디로 두든 시퍼런 산을 피할 수 없는
백양리와 가정리. 한치령 옛길은 춘천의 두 오지마을을 잇는 고개입니다. 옛길의 거리는 무려 삼십 리. 하지만 한 마을처럼 사이좋게 살았던 두
마을사람들은 그 거리를 고작 ‘한 치’로밖에 여기지 않았고, 한치령이라는 이름은 거기서 유래됐다고 마을사람들은 믿고 있습니다. 그 유래가 맞는지
틀리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마음만 가깝다면 삼십 리도 한 치가 될 수 있다는 것, 우리가 믿어야 할 건 그것이기 때문입니다.
돌아보니 아무도 없습니다. 함께 열차를 탔던 그 많은 사람들 중에, 비 오는 평일 아침 시골 간이역에 내리는 이는
역시나 존재하지 않습니다. 한 때는 가고 오고 기다리는 사람들로 가득했을, 오늘처럼 비 내리는 날이면 젖은 짐을 싣고 부리느라 더욱 소란스러웠을
경강역. 이곳에선 지금 철도원 아저씨들이 기르는 몇 포기의 토란과 몇 마리의 닭이, 사람 대신 사람을 맞고 사람을 보냅니다. 몹시 쓸쓸하지만,
그렇다고 간이역 특유의 훈훈함까지 사라진 건 아닙니다. 사람들은 없어도 오랜 세월 이 공간에서 나눠온 사람들의 ‘체온’은 대합실 곳곳에 더께처럼
앉아있습니다. 그 때문입니다.
미래에서 날아온 안타까움 하나가, 머릿속에 둥지를 틉니다. 새길이 나면 이내 버려지는 옛길처럼, 경춘선
복선전철이 완공되는 몇 년 뒤면 쓸쓸하지만 따뜻한 이곳도 ‘옛 역’의 이름으로 사라질까요. 이런 식으로, 체온처럼 따스했던 것들은 죄다 잊혀지고
마는 걸까요.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있는 동안, 백양2리 전수남 이장님(53세)이 옵니다. 옛길입구만 알려달라고 하려던 참인데, 비 오는 날 그 험한 길을
걸어 넘는 건 위험하다며 이장님은 한사코 자신의 4륜구동차로 옛길에 동행해줄 것을 고집합니다. 폐가 될 것 같아 몇 번을 거절하지만, 이장님의
‘따뜻한 고집’을 꺾는 데는 끝내 실패합니다. 반드시 걸어 넘겠다는 다짐 작지 않았음에도, 고백하자면 눈물이 날 만큼 고맙습니다. 경강역에서
차로 5분 남짓, 마을입구로 들어오자마자 휴대폰부터 ‘먹통’이 되는 산골마을 백양리. 그 끝자락에 댕기처럼 매달려있는 ‘한치령 옛길’은 돌이라
부르기엔 너무 크고 바위라 부르기엔 조금 작은 것들이 많이 깔려있어, 비 오는 날 걷기에는 아닌 게 아니라 너무 위험해 보입니다. 어디
‘위험에서 벗어나는 행운’뿐인가요, 옛길에 대한 이야기를 ‘라이브’로 듣는 행복까지 덤으로 얻습니다.
“춘성대교와 강변도로가 생긴
게 70년대 초반인데, 그 전까지 춘천시내로 가려면 고개 넘어 가정리로 가야했어요. 걷거나, 제무시(GMC)라고 부르던 트럭을 타고 고개를
넘어가서 마을에 필요한 비료 같은 것들을 한꺼번에 구해오곤 했죠. 강촌서 싣고 고개를 넘어오려면 차로도 서너 시간이 걸렸으니 걷는 거야 말할
필요가 있나? 행정구역은 춘천시지만 가평읍내가 더 가까워서, 생필품은 조각배를 타고 강 건너 가평으로 가서 구해오는 일이 더 많았어요. 한치령
말고도 ‘뱃길’이라는 옛길이 하나 더 있었던 셈이죠.”
이장님의 이야기는, 불과 30여년 전까지 마을사람들을 부지런히 실어 나르던
‘5,6인승 조각배’로 옮겨갑니다. 마을의 공동소유였다는, 일명 ‘쪽박배’라 불리던 나무배. 마을사람 중에서 노를 가장 잘 젓는 사람을
뱃사공으로 두고 가을걷이가 끝나면 집집마다 그에게 곡식을 나눠줬다는 이야기도, 뱃사공이 대개 노인들이어서 바람 없는 날은 여자남자 할 것 없이
젊은 사람들이 노를 젓곤 했다는 이야기도, 여간 흥미롭지 않습니다. “고개가 가로막혀 있었는데도, 백양리와 가정리 사람들은 한 마을처럼 지내왔어요. 혼인도 서로 많이
했고요. 삼십 리나 되는 고개를 ‘한 치’처럼 가깝게 느꼈다고 해서 ‘한치령’이라는 이름이 붙었다는 얘길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어요.” 정확한
유래는 아니라고 이장님이 아무리 덧붙여도, 이름이 주는 울림은 전혀 훼손되지 않습니다. 길이 아무리 멀어도 마음만 가깝다면 한 치가 될 수
있다는 ‘놀라운 진리’를 이곳에서 배웁니다.
이야기에 취해 고갯길 풍경을 많이 보지 못했다는 데 문득 생각이 미칩니다. 이제라도 제대로 봐야지
작정하는데, 그새 고갯마루. 아쉬움도 잠시,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쉬이 그칠 것 같지 않았던 비가 거짓말처럼 그치고, 첩첩으로 포개진 파란
산 위로 그보다 더 파란 가을하늘이 고개를 내밉니다.“저기 비석에 새겨진 날짜 보이죠? 72년 11월 10일이라고 쓰인 거. 엄밀히 말해 지금
온 길은 옛길이 아니라 저 때 닦은 군사도로예요. 진짜 옛길은 숲에 가려져 사라진 지 이미 오래지. 그래도 낙엽이 모두 떨어지고 난 뒤면,
아직도 옛길의 흔적이 보여요.”
‘진짜 옛길’이 아니라고 실망하지는 않습니다. 지금 비록 갈 순 없어도, 오랜 세월 사람들이 다닌 길의
흔적이란 그리 쉽게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된 까닭입니다. 기계로 밀어내거나 시멘트로 덮어버리지만 않는다면, 희미하게나마 ‘끝내’
살아남는 길. 그 질긴 생명력 앞에서 잠시 숙연해집니다.
지금은 모두 떠나버린, 자연만큼이나 아름다웠던 이웃들을 할아버지는 기억합니다. 자식들과 이웃들, 옛길이 ‘고향’인 그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할아버지는 이곳을 지킬 생각입니다. 할아버지에게는 옛길이 ‘현재의 길’을 넘어 ‘미래의 길’이기도 한 셈입니다.
따뜻한 사연 듣고 내려오는 길, 얼마 지나지 않아 왼쪽으로 ‘콩밭 매는 모녀상’이 보입니다. 박칠성 할아버지가 만든 두 개의 동상에는, 베적삼 흠뻑 적시며 콩밭을 매던 모녀의 고단한 삶이 고스란히 녹아있습니다. 어머니(동상) 옆에 핀 하얀 백일홍과 딸 옆에 핀 붉은 백일홍이 노동으로 한세월을 살아낸 이 땅의 모든 어머니와 딸에게 보내는 이 길의 ‘헌화’처럼 여겨집니다.


비도 그쳤으니, 이제 이장님을 놓아드리기로 합니다. 고갯마루에서 가정리에 이르는 길을, 다시 고갯마루로 돌아와 ‘얘기를 듣느라
흘려버린’ 백양리 쪽 길을 지금부턴 발로 느껴볼 작정입니다. 만만찮은 여정인 줄은 알지만, 하늘이 저렇게 맑은 한, 햇살이 저렇게 고운 한,
험난함은 고스란히 즐거움이 되리라 믿습니다.
가정리 쪽으로, 다시 백양리 쪽으로. 산빛에 ‘홀려’ 양쪽 길을 모두 걷고 나니, 오후
햇살이 이미 깊습니다. 누렇게 익어가는 들판 위를 아이처럼 굴러다니는 가을햇살. 햇살에 홀려 다시 길을 걷다가, 커다란 느티나무 아래 모여 앉아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마을 어른들을 만납니다.
“싸리버섯 주우러 아침밥만 먹으면 고갤 올랐어. 한 광주리 다 채우면 그걸 머리에 이고
경강역에 가서 기차를 타는 거야. 청량리에 가서 경동시장 상인들한테 넘겨주고 나면 하루가 저물곤 했지. 힘은 들었어도 그 때가 정말 좋았던 것
같아.”
“40년쯤 전의 일이야. 조밭이랑 콩밭이 한치고개에 있어서, 해 뜨자마자 지게 지고 고개 위로 올라가선 해질 무렵에 내려오는
생활을 맨날 했어. 도시락을 두 개 씩 싸가지고 올라가서 일하곤 했으니, 집에서 먹은 밥보다 고개에서 먹은 밥이 더 많았지. 지게 가득 무거운
걸 싣고도 그 땐 뛰어서 고개에 올라 다녔는데 말이야.” ‘젊은 날의 추억’을 더듬는 최재옥 할머니(67세)와 이상용 할아버지(65세)의 얼굴이
그리움으로 환합니다.


맞은 편 길에선, 나락들이 제 몸을 말리느라 누워있습니다. 나락을 비롯한 온갖 곡식들이 도로 한쪽을 차지하는 까닭에, 가을이면 곧잘 1차선도로가 되고 마는 시골의 2차선도로. 도시에서라면 밀려드는 차량들의 등살 때문에 어림없는 일일지 몰라도, 이곳에선 차보다 나락이 ‘당연히’ 우대됩니다. 가만…. 동네에서 제일 먼저 가을걷이를 한 신동순 할머니(83세)가 지팡이를 든 채 고이 널어둔 나락들을 헤치며 걸어갑니다. 어찌된 영문인가 싶어 여쭙는데, 곱게 편 나락에 밭고랑처럼 골을 내주면 바람이 잘 들어 쉬이 마른다는 답변이 돌아옵니다. 한평생 땅을 일궈온 어른들이 몸으로 얻어낸 지혜. 한참을 지켜보노라니, 할머니가 내는 ‘골’이 하나의 ‘길’처럼 여겨집니다.
남들이 나락을 망치는 것으로 보든 말든 자신의 지혜를 믿으며 묵묵히 걸어가는 길. 낮잠이라도 자려는지, 할머니의 ‘위대한 길’ 위에 가을햇살이 아예 누워있습니다.
걷기 시작하니 비로소 ‘길 위의 가을’이 느껴집니다. 도토리를 문 청설모들의 발걸음이 바쁘고, 성질 급한 나무 몇 그루는 벌써부터 제 잎을 물들이느라 분주합니다. 봄처럼 화려하지도, 여름처럼 늠름하지도, 겨울처럼 처연하지도 않은 가을산길. 이 계절에 차로 길을 ‘즐기는’ 것은 사람과 자연이 가장 편안한 눈높이로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포기하는 일이 될 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