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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치령 사람들의 생활에 산신당이 얼마나 가까이 들어와 있는지를 알게 된 셈입니다. 내리막길은 점점 더 험해집니다. 올라온 길보다 한참을 더 내려가면 만나지는, 오지 중의 오지 마락리. 실개천을 사이에 두고 오른쪽으론 마을의 명물인 ‘마주바위’가, 왼쪽으론 한 때 주막이었음직한 작은 구멍가게와 한 때는 아이들의 웃음소리 가득했을 폐교(지금은 청소년수련장으로 변모해있습니다)가 보입니다. 산자락으로 옹기종기 모여 앉은 집은 얼추 열두어 채. 반가운 마음에 마을 안을 돌아다니지만, 왠일인지 사람들이 보이지 않습니다. 살림살이로 보아 폐가들은 분명 아닌데, 다들 어디로 간 걸까요. 고개를 갸웃거리는 순간, 어디선가 장작 패는 소리가 들립니다. 소리를 따라 올라가니, 마을 꼭대기에 사는 최문규 할아버지(82세)와 박순녀 할머니(80세)가 저녁채비를 하고 계십니다.


“겨울 나러 다들 도시 사는 자식들 집으로 떠났어. 한 번 눈이 왔다 하면 오도 가도 못 하니, 여기서 겨울을 나는 게 쉽지가
않거든. 우리랑 아랫집 할머니만 여기서 겨울을 나. 자식들은 자꾸 오라고 성환데, 우린 그래도 여기가 마음이 편해.”
왜 아니겠습니까. 이
곳에서 나서 평생 이곳에서만 살았다는 두 분입니다. 이분들에게 ‘진짜 고립’은 눈 쌓인 겨울날 고치령에 발이 묶이는 것이 아니라, 산도 나무도
얘기 나눌 사람도 없는 도시에서 섬처럼 겨울을 나는 일일 터입니다. 할 일이라곤 장작을 자르거나 군불을 지피고, 저장해둔 것들로 소박한 밥상을
차려 먹는 일이 전부지만, 두 분의 겨울일상은 우리들의 그것보다 충만해 보입니다. “겨울이라고 마냥 외롭지는 않아. 설날이면 애들이 고개 너머
좌석리에다 차를 세워두고 이십 리를 걸어서 집엘 오거든. 걔들 나이도 이제 오십이 넘었는데, 오지 말래도 기를 쓰고 오니 말릴 수가 있어야지.”
말은 그렇게 해도, 해마다 설날이면 긴긴 눈길을 걸어 집으로 돌아오는 자식들에 대한 자랑이 두 분의 얼굴에
가득합니다.


이제, 떠나지 않은 또 한 집 황달련 할머니(73세) 댁으로 내려갑니다. 외로움이 산처럼 깊었던 할머니는 누군지도 묻지 않고, 군불 피던 따뜻한 손으로 내 손부터 덥석 잡으십니다.
“눈보라가 휘날리는 작년 정월에, 영주 시내에서 아는 사람 잔치가 있었어. 가보긴 해야겠는데, 눈이 허벅지까지 푹푹 빠진단 말이야. 에라 모르겠다, 장화신고 지팡이 짚고 길을 나섰어. 고치재를 넘는 데만 5시간 가까이 걸렸는데, 내가 온 거 보고 사람들이 혀를 다 내두르더라니까.”
할머니의 ‘무용담’을 듣는 동안, 서서히 어둠이 내립니다. 마을꼭대기로 다시 올라가, 두 집에서 피워 올리는 저녁연기를 오래도록 바라봅니다. 훗날 고치령을 떠올릴 때, 이곳 사람들이 모신다는 두 명의 산신은 잊어도 두 집에서 피워 올리는 저녁연기는 아마 잊지 못하겠지요. 내가 본 건 고치령을 지켜준다는 산신이 아니라,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 묵묵히 고갯길을 지키며 살아가는 ‘사람들’인 까닭입니다. 연기가 사라져가는 걸 아쉬워 할 틈도 없이, 크고 작은 산골의 별들이 까만 하늘을 이내 수놓습니다. 그걸 보노라니, 어설픈 글귀 하나가 머릿속에서 불현듯 만들어집니다. ‘가장 어두운 순간에 빛나오는 새별과 같이, 가장 추운 계절에 밝아오는 새해와 같이….’ 채 완성시키지 못한 문장인데도, 가슴 속에선 벌써 희망의 나팔이 울립니다.
단종 복위운동에 나섰던 금성대군은 순흥(영주) 땅으로 유배되고 세조에게 내몰린 단종은 영월 땅으로 안치되는데, 두 사람을 갈라놓은 비운의 고개가 고치령이었습니다. 복위운동은 결국 실패로 돌아가지만, 두 사람을 향한 민심은 단종을 태백산신으로, 금성대군을 소백산신으로 섬기고 있습니다. 그러나 고치령 길을 걸으며 더욱 가슴에 남은 것은 고치령을 지켜준다는 산신이 아니라,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 묵묵히 고갯길을 지키며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