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슴이 설레었다. 어쩌면 이 시대의 유일한
자유인일지도 모를 김복현 씨(61세)를 만나러 가는 길. 누구나 꿈꾸지만 결코 누구나 이룰 수는
없는 꿈. 그는 과연 어떤 모습으로 자신만의 파라다이스를 일구었을까.
전라남도 고흥. 포구에서 다시 배를 빌려 타고 15분 여 바다를 달리자 드디어 닭섬이 보인다. 닭이
누워 있는 모양을 닮았다고 해서 붙은 이름의 닭섬. 섬에 도착하니 사람은 보이지 않고 수많은 닭들이
모여든다. 정작 보이지 않는 섬 주인을 찾아 산으로 오르자 숲이 빽빽하게 우거져 있다. 야트막한
산등성이를 올라 다시 바다가 보일 즈음, 드디어 김복현 씨를 만날 수 있었다. 닭섬의 끝, 닭의
머리 부분에 있는 등대까지 가는 방향으로 나뭇가지를 베어 산길을 내던 중이라고. 다시 길을 내면서
그는 연신 정금이며 맹감 등 나무 열매들을 따 먹으며 아이처럼 즐거워했다.
“원래 이곳 고흥이 고향이에요. 어렸을 때 형제들과 나무하러 이 섬까지 와서는 바닷가에 드러누워서
이 섬이 우리 섬이면 얼마나 좋을까 이야기하곤 했습니다. 그때부터 제 꿈은 무인도에서 나만의 왕국을
일구고 사는 것이 되었지요.”
바닷가에서 자란 소년은 섬을 꿈꾸었고, 그 꿈을 늘 가슴 한켠에 담고 있었다고 한다. 15살에 고향을
떠나 여수에서 고등학교까지 다니다가 대학갈 학비를 벌기 위해 군대를 갔다. 다시 꿈을 이룰 돈을
벌기 위해 월남전에 참전했고 제대할 때는 해외 유학도 갈 수 있을 만큼의 돈을 모았다. 그러나 진학을
포기하고 사업에 뛰어든 뒤 몇 차례의 희비 끝에 빈손이 되어버렸다. 그때 지금의 부인을 만나 결혼하고
새롭게 출발하면서 몇 년 만에 번듯하게 자수성가를 이루었다. 그 후 지난 80년 집안 제사를 지내기
위해 고향에 내려왔다가 어릴 적 꿈의 태동이 되었던 그 닭섬을 매입하게 되었다.
섬을 산 이후 바닷가에서 돌멩이들과 황토를 날라 상자 같은 돌집을 지었다. 성처럼 화려하지도 별장처럼
멋스럽지도 않지만 직접 지은 튼튼한 집이야 말로 자신에게 가장 어울린다고 생각하는 그. 비록 해마다
가족과 함께 내려와 지내겠다던 계획은 뜻대로 되지 않았지만, 5년 전 2남 1녀 자녀들이 모두 독립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다고 생각했을 때 과감히 사업과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내려왔다.


오랫동안 꿈꾸기는 했지만, 처음 섬에 와서는 모든 것이 낯설기만 했다. 25년 전 지어놓고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탓에 많이 망가진 집을 보수하기 위해 친구와 둘이 텐트를 치고 생활 하던 중 태풍이
찾아왔다. 처음으로 부딪친 태풍 앞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던 두 사람은 배만 붙들고 있었다.
그러나 텐트도 날아갈 정도의 강풍과 높은 파도에 맞서 싸우던 것이 나중에 알고 보니 얼마나 무모한
일이었던지. 그렇게 자연 현상에 대처하는 방법을 몰랐던 도시인은 점차 섬에 동화되고 자연인이
되어갔다.
“처음엔 마냥 좋았어요. 고생이고 뭐고 너무 좋은 거예요. 식구들은 왜 그런 고생을 하냐고 난리였지만
나는 하나도 고생으로 여겨지지 않았지요. 태풍에 부딪치고 모기와의 전쟁을 치루는 사이에 낙원을
누리려면 자연인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죠.”
무엇보다 큰 깨달음. 비록 전기도 들어오지 않고 빗물을 받으며 혼자 사는 게 외롭기는
하지만 얻는 게 있으면 잃는 게 있고, 잃는 게 있으면 얻는 게 있는 법이라는 진리를 체득한
것이다. 진짜 낙원을 누리고 싶다면 버려야 한다는 그에게서는 아등바등하며 두 손 가득 담으려
애쓰는 삶에서 한 걸음 벗어난 편안함이 엿보였다.
도시의 삶을 버린 대신 얻은 것은 비단 깨달음만은 아니다. 무엇보다도 건강을 되찾았다. 높은
당뇨수치도 내려갔고, 높았던 혈압과 통풍, 요산수치도 모두 정상이 되었다. 이 곳의 삶을 반대하던
아내마저 안심할 정도이다.
“사랑과 감사에 인색했는데 섬에 와서 모든 것에 감사하고 만물을 아끼고 소중히 여기는 사랑을
배웠어요. 세상 속에서는 물질적인 것에 젖어 있고 고마워도 고마운 줄 모르고 기뻐도 기쁜 줄
모르고 지냈는데, 부부, 자식, 모든 살아있는 것들에 대한 사랑에 새롭게 눈뜨게 해준 닭섬에
감사하고 있습니다.”
매일 아침마다 자연인으로 돌아가는 김복현 씨. 실오라기 하나도 문명의 것을 걸치지 않고 순수
자연인으로서 바닷물에 들어간다. 자유를 만끽하는 그만의 특별한 의식인 셈이다. 그리고는 산 위에
올라 운동도 하고, 밤새 쳐놓은 그물을 건져 올려 미역과 다시마를 뜯고 우럭, 장어, 낙지는
나무 꼬챙이에 꿰어 모닥불에 구워 먹는다. 햇살이 강한 낮에는 나무 사이에 그물침대를 치고 휴식을
즐기는 등 진정 속세와 담쌓은 자유인의 생활을 만끽하는 그에게 아내만 함께 있으면 더 바랄 것이
없다고.
“100% 자연을 느끼려면 문명을 버려야 하는데, 사람들이 물질의 노예가 되어서 살아요. 그러나
자연을 누리려면 먼저 자연인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편한 것을 버리고 불편함을 감수할 때 진정한
자유인이 되죠. 버리지 않으면 자격이 없어요.”
문명이 빈곤해졌을 때 오히려 풍부한 자연을 누릴 수 있다는 그에게서는 버림으로써 얻은 자유의
냄새가 물씬 풍겨 나온다. 원시 경험 코스를 개발해서 자연을 즐기고 싶은 사람들에게 섬을 개방하고
싶다는 그의 또 다른 꿈에 동승해본다면 누구라도 자연인으로 한걸음 나설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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