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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엔 들르지 않기로 합니다. 풍기 나들목에서 빠져나온 뒤로 내내 ‘부석사’라 쓰인
표지판을 따라 차를 몰지만, 길 안내를 받을 뿐 부석사엔 잠깐의 시간도 내주지 않을 생각입니다. 잘 익은 사과알들이 꼬마연등처럼 매달려있던 어느
가을 이 길을 달릴 때도, 사과꽃이 눈처럼 흩날리는 봄날 다시 이 길을 달리겠노라 마음먹을 때도, 목적지는 언제나 부석사였습니다. 이토록 가까운
곳에 그토록 오랜 세월 고치령이란 옛길이 함께 있어왔다는 건 왜 진작 알지 못했는지요. 이름난 것들을 바라보느라 눈길 한 번 제대로 주지 않았던
‘이름나지 않은 것들’. 돌아보니 그런 것들이 참 많습니다. 꽃이 그랬고, 책이 그랬으며, 길이 그랬습니다. 그걸 반성할 방법이 마땅히 떠오르지
않으니, 오늘은 다만 이름난 것(부석사)을 외면하는 것으로 이름나지 않은 것(고치령)에 대한 미안함을 전하려 합니다.
단산면에
이르러 ‘부석사 길’을 버립니다. 왼편 도로로 길을 바꾸고 산의 품으로 파고들면 고치령 입구마을인 옥대리와 좌석리. 제가 품은 아이들이 또 한
살 나이 먹기를 기다리는 인삼밭들 사이로, 아무 것도 품지 않은 ‘텅 빈 들녘’이 보입니다. 쓸쓸해 보이지는 않습니다. 지금 비록 비어있어도,
그 들녘이야말로 또 한 해의 결실을 가져다 줄 ‘수확의 자궁’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쓸쓸한 마음이 들게 하는 건 오히려 하늘 향해 늠름하게 팔
벌리고 있는 사과나무들입니다. 홍옥이며 국광 같은 ‘추억의 사과’들을 밀어내고, 경제논리의 승자로 살아남은 부사. 우리가 사과라고 부르는 것들이
죄다 그걸 의미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란 여간 슬픈 일이 아닙니다. 오솔길과 숲길이 하나 둘 사라지고 길이란 길이 모조리 찻길로 바뀌고 있는
것도 그와 다르지 않기에, 옛길 위의 사과밭이 오늘 유독 쓸쓸해 보입니다.
마음의 공기는 이내 바뀝니다. 바야흐로 지금은
2004년이 끝나고 2005년이 시작될 무렵. 태백이 끝나고 소백이 시작되는 고치령에서 한 해의 끝을 돌아볼 수 있게 됐으니, 경북과 충북과
강원이 사이좋게 이마를 맞대고 있는 ‘착한 길’에서 새해 맞을 마음을 가누게 됐으니, 이만하면 행운이라 불러야 마땅한 일입니다.
“단산장날이면 마락리(경북 영주), 의풍리(충북 단양), 와석리(강원 영월)에서 넘어오는 사람들로 고치령은 늘 바글바글했었죠. 도는
달라도, ‘삼도계’라는 걸 만들어 활동했을 정도로 세 마을 사람들은 서로 유대감이 깊었어요. 그건 알고 온 거죠? 세조에게 내몰린 단종은 영월
땅으로 안치되고 어린 조카의 편에 섰던 금성대군은 순흥(영주) 땅으로 유배되는데, 두 사람을 갈라놓은 비운의 고개가 바로 고치령이었다는 거요.
복위운동은 결국 실패로 돌아가지만, 두 사람을 향한 이곳의 민심은 단종을 태백산신으로, 금성대군을 소백산신으로 섬기기에 이른 겁니다. 지금도
고갯마루에 있는 산신당에선 두 신을 모셔놓고 한 해에 두 번 마을의 안녕을 비는 제를 지내요.” 고치령 입구에서 가시오가피를 돌보던 허정진
아저씨(60세)의 이야기입니다. 300년 넘게 대대로 이 동네에서만 살아왔다는 아저씨 덕분에 많은 걸 알게 됐으니, 이제 옛길은 아는 만큼 더
잘 보일 터입니다.
길은 참 예쁩니다. 차 한대가 넉넉히 지나갈 수 있는 길 양쪽으로 키 큰 소나무들과 쭉 뻗은 낙엽송들이
마주서있는 풍경. 한 계절 전에 왔다면, 소나무의 초록빛과 낙엽송의 금빛, 그 사이로 쏟아지는 햇빛이 사람마음깨나 홀렸겠습니다. 초록빛과 금빛은
없어도 햇빛만은 지금도 눈부셔서, 그나마 위안이 됩니다.예쁘긴 하되 옛길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싶던 포장길은 이내 끝나고, 이제부턴 덜컹거리는
비포장길입니다.
‘옛길다운’ 그 길을 조금 달리니 이내 고갯마루.가장 먼저 눈에 띄는 건 고치령이 태백과 소백의
경계임을 말해주는 두 개의 장승입니다. 태백을 상징하는 장승과 소백을 상징하는 장승의 모습이 마치 부부 같아서, 그 사이에 있는 옛길은 그대로
두 산이 낳은 자식처럼 여겨집니다. 태백산신과 소백산신을 함께 모신다는 산신당에선 막걸리 냄새가 진동합니다. 가까운 시간에, 속이 답답한
누군가가 다녀갔음이 틀림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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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치령 사람들의 생활에 산신당이 얼마나 가까이 들어와 있는지를 알게
된 셈입니다. 내리막길은 점점 더 험해집니다. 올라온 길보다 한참을 더 내려가면 만나지는, 오지 중의 오지 마락리. 실개천을 사이에 두고
오른쪽으론 마을의 명물인 ‘마주바위’가, 왼쪽으론 한 때 주막이었음직한 작은 구멍가게와 한 때는 아이들의 웃음소리 가득했을 폐교(지금은
청소년수련장으로 변모해있습니다)가 보입니다. 산자락으로 옹기종기 모여 앉은 집은 얼추 열두어 채. 반가운 마음에 마을 안을 돌아다니지만,
왠일인지 사람들이 보이지 않습니다. 살림살이로 보아 폐가들은 분명 아닌데, 다들 어디로 간 걸까요. 고개를 갸웃거리는 순간, 어디선가 장작 패는
소리가 들립니다. 소리를 따라 올라가니, 마을 꼭대기에 사는 최문규 할아버지(82세)와 박순녀 할머니(80세)가 저녁채비를 하고 계십니다.

“겨울 나러 다들 도시 사는 자식들 집으로 떠났어. 한 번 눈이 왔다 하면 오도 가도 못 하니, 여기서 겨울을 나는 게 쉽지가
않거든. 우리랑 아랫집 할머니만 여기서 겨울을 나. 자식들은 자꾸 오라고 성환데, 우린 그래도 여기가 마음이 편해.”
왜 아니겠습니까. 이
곳에서 나서 평생 이곳에서만 살았다는 두 분입니다. 이분들에게 ‘진짜 고립’은 눈 쌓인 겨울날 고치령에 발이 묶이는 것이 아니라, 산도 나무도
얘기 나눌 사람도 없는 도시에서 섬처럼 겨울을 나는 일일 터입니다. 할 일이라곤 장작을 자르거나 군불을 지피고, 저장해둔 것들로 소박한 밥상을
차려 먹는 일이 전부지만, 두 분의 겨울일상은 우리들의 그것보다 충만해 보입니다. “겨울이라고 마냥 외롭지는 않아. 설날이면 애들이 고개 너머
좌석리에다 차를 세워두고 이십 리를 걸어서 집엘 오거든. 걔들 나이도 이제 오십이 넘었는데, 오지 말래도 기를 쓰고 오니 말릴 수가 있어야지.”
말은 그렇게 해도, 해마다 설날이면 긴긴 눈길을 걸어 집으로 돌아오는 자식들에 대한 자랑이 두 분의 얼굴에
가득합니다.
이제, 떠나지 않은 또 한 집 황달련 할머니(73세) 댁으로
내려갑니다. 외로움이 산처럼 깊었던 할머니는 누군지도 묻지 않고, 군불 피던 따뜻한 손으로 내 손부터 덥석 잡으십니다.
“눈보라가
휘날리는 작년 정월에, 영주 시내에서 아는 사람 잔치가 있었어. 가보긴 해야겠는데, 눈이 허벅지까지 푹푹 빠진단 말이야. 에라 모르겠다,
장화신고 지팡이 짚고 길을 나섰어. 고치재를 넘는 데만 5시간 가까이 걸렸는데, 내가 온 거 보고 사람들이 혀를 다 내두르더라니까.”
할머니의 ‘무용담’을 듣는 동안, 서서히 어둠이 내립니다. 마을꼭대기로 다시 올라가, 두 집에서 피워 올리는 저녁연기를 오래도록
바라봅니다. 훗날 고치령을 떠올릴 때, 이곳 사람들이 모신다는 두 명의 산신은 잊어도 두 집에서 피워 올리는 저녁연기는 아마 잊지 못하겠지요.
내가 본 건 고치령을 지켜준다는 산신이 아니라,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 묵묵히 고갯길을 지키며 살아가는 ‘사람들’인 까닭입니다. 연기가
사라져가는 걸 아쉬워 할 틈도 없이, 크고 작은 산골의 별들이 까만 하늘을 이내 수놓습니다. 그걸 보노라니, 어설픈 글귀 하나가 머릿속에서
불현듯 만들어집니다. ‘가장 어두운 순간에 빛나오는 새별과 같이, 가장 추운 계절에 밝아오는 새해와 같이….’ 채 완성시키지 못한 문장인데도,
가슴 속에선 벌써 희망의 나팔이 울립니다.
단종 복위운동에 나섰던 금성대군은 순흥(영주) 땅으로 유배되고 세조에게 내몰린 단종은
영월 땅으로 안치되는데, 두 사람을 갈라놓은 비운의 고개가 고치령이었습니다. 복위운동은 결국 실패로 돌아가지만, 두 사람을 향한 민심은 단종을
태백산신으로, 금성대군을 소백산신으로 섬기고 있습니다. 그러나 고치령 길을 걸으며 더욱 가슴에 남은 것은 고치령을 지켜준다는 산신이 아니라,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 묵묵히 고갯길을 지키며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