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지

정선 북동마을

지리산자연인 2006. 1. 21. 23:34

오늘 하루 무언가로 변신할 수 있는 행운이 주어진다면, ‘버스’가 되고 싶습니다. 유치원생도 그런 유치한 가정은 하지 않는다고 나무란대도 할 수 없습니다. 사람을 향한 그리움이, 마을에 드리워진 산그늘만큼이나 깊은 두메산골. 이왕이면 ‘마을에 없는 것’이 되어, 단 하루만이라도 사람과 사람을 부지런히 잇고 싶습니다. 생각해보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닌데도(버스가 될 수는 없지만 버스노릇을 할 수는 있으므로), 불가능한 변신이라도 하게 된 양 가슴이 뜁니다.
출발이 좋습니다. 마을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첫 손님’을 만납니다. 상북동(북동마을은 상북동 월애곡과 하북동 함바위골로 나뉘어있습니다) 끝집에 사는 김덕령 할머니(80세). 50도는 족히 넘는 가파른 산비탈을 따라 한참을 달린 뒤 더 이상 길이 나지 않은 곳에 할머니의 집은 있습니다. 고운 햇살이 집안 구석구석을 매만지는 작은 흙집. 그곳에서 할머니는 할머니만큼이나 작은 몸집을 가진 강아지 ‘백성이’와 둘이 삽니다.

굽은 허리로 네댓 가지 푸성귀를 기르며, 그 어떤 소음도 쓰레기도 세상으로 내보내지 않고 가만가만 살아갑니다. 마을의 가장 높은 곳에서 가장 낮게 살아가는 사람. 그런 할머니가 ‘차비’를 주십니다. 장터에서 사왔음직한 눈깔사탕 두 개. 세상에서 가장 달콤한 차비를 받아들고 내려오는 길, 험한 길에 가려져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던 엉겅퀴며 민들레가 비로소 눈에 들어옵니다.

다시, 처음의 자리에서 순회를 시작합니다. 꽤 오랜 시간이 지났건만, 김덕령 할머니를 잇는 승객은 나타나질 않습니다. 손님은 없어도 정거장에 이르면 버스는 서야 하는 법. 산비탈에 웅크리고 누워 제 몸을 쉬이 드러내지 않는 함종식 할아버지(65세)와 최월규 할머니(64세)네 집으로 들어섭니다. 어쩐지, 멀리서 바라본 집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싶었습니다. 놀랍게도 이 집에는 아직 전기가 들어오지 않습니다. 화로에 끓인 손칼국수며 부침개로 새참을 먹고, TV대신 건전지 낀 라디오로 세상소식을 전해 들으며, 날이 저물면 직접 만든 호롱불로 방을 밝히는 노부부의 하루.

문명의 그늘 아래 있지 않은 두 분은 뜻밖에도 전국 객지를 돌며 20여 년 장돌뱅이 생활을 한 이력을 갖고있습니다. 때문에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다는 것이 얼마나 불편한 일인지 그들은 모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바로 그 불편함 때문에 재미난 것이 얼마나 많은 지도 잘 압니다. 화로에 끓인 찌개의 맛과 라디오로 듣는 노래의 맛, 호롱불로 바라보는 사물의 색다름이나 전화 없이 찾아온 자식들을 만날 때의 이루 말할 수 없는 반가움 같은 것들….

집 곳곳에서 ‘보물’들이 발견됩니다. 젊은 시절 멧돼지를 잡을 때 썼다는 투창이나, 경운기 대신 밭을 갈 때 쓰는 쟁기 같은 것을 반드시 사용시범과 함께 보여주는 할아버지의 얼굴이 아이처럼 천진합니다. 아마, 영원히 잊을 수 없을 겁니다. 직접 만든 쟁기로 두 분이 밭을 가는 풍경. 할아버지가 소 대신 쟁기를 끌면, 할머니는 ‘이랴이랴’ 소 모는 소리를 내며 밭을 갑니다. 소도 하기 힘든 일을 직접 하면서도, 뭐가 그리 좋은지 두 분은 연신 까르륵댑니다.

“영감, 정선아라리 한 번 해보드래요.” 작업이 끝나고 숨을 고를 사이도 없이 할머니의 주문이 떨어집니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 할아버지의 노래가 시작됩니다. 입으로 부르는 게 아니라 저린 가슴으로 부르는 노래. 정선땅에 오면 주민들의 입을 통해 꼭 듣고 싶었던 정선아리랑을 그렇게 듣습니다. 두 분을 보고있으면, 할아버지의 노래가 어쩌면 할머니에게 보내는 사랑노래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절로 듭니다. 그게 아니라면, 44년을 함께 살고도 할아버지가 노래할 때의 할머니 눈빛이 그토록 애틋할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큰 일입니다. 버스노릇을 하겠다는 애초의 계획은 어디로 가고, 두 분의 집에서 그렇게 오래 놀고도 오래오래 놀고 싶은 곳이 또 눈에 들어옵니다. 빨간 지붕과 하얀 시계탑이 동화 속 그림 같은 북동분교. 한 방송사 리모델링 프로그램에서 예쁘게 손질해준 이 작은 학교에는 ‘독수리 오남매’가 있습니다.

네 살부터 ‘가짜 학생’으로 학교에 다닌 막내 다진이(1학년)와 역시 다섯 살부터 학교에 다닌 개구쟁이 대현이(2학년), 벌에 쏘인 얼굴에 부기가 빠지면서 잘 생긴 얼굴을 이제 갓 회복한 신용이(3학년), 동생들을 잘 챙기는 맏언니 소원이(6학년)와 뛰어난 문학적 감수성을 가진 창용이(6학년)가 그들입니다. 서로의 버릇은 물론이고, 몇 살까지 요에 지도를 그렸는지, 썩은 이가 몇 개인지까지 훤히 잘 아는 녀석들을 ‘남매’라고밖에는 부를 방법이 없습니다.

가르친다기보다는 함께 뒹군다는 표현이 더 어울리는 유재학(33세), 윤은환(29세) 선생님은 3년 전, 이곳으로 자원해 들어온 부부교사입니다. 10명이 채 안 되는 작은 학교에서 아이들과 온전히 교감하는 것이 오랜 꿈이었다는 그들이 말합니다. 정선읍에서 아이들과 먹는 자장면이나 비 오는 날 아이들과 부쳐먹는 부추부침개보다 맛있는 걸 먹어 본 적이 없고, 아이들과 떠난 여행지보다 아름다운 곳을 아직 보지 못 했다고.

“학원이나 다른 문화시설이 없어서 교사가 해줄 수 있는 게 너무 많아요. 자연과 더불어 살아온 아이들이어서 마음 속에 품고있는 세계가 넓고 깊죠. 그걸 조금 매만져주기만 해도 아이들에게선 무궁무진한 표현들이 쏟아져 나옵니다. 교사로서 그것처럼 행복한 일이 또 있을까요?”


실개천 흐르는 소리 요란한 운동장에서 아이들과 선생님이 배드민턴을 칩니다. 지금이 체육시간인지 노는 시간인지, 누가 선생님이고 누가 학생인지, 구분되지 않습니다. 그 ‘구분 없음’이 너무 보기 좋아서, 6학년인 소원이와 창용이가 졸업하고 나면 학교가 문을 닫게 될지도 모른다는 윤 선생님의 걱정이 자꾸만 목에 걸립니다.

햇빛마저 초록빛으로 물드는 산골의 오후. 시린 초록빛 사이로, 까만 장화를 신은 까만 얼굴의 소년이 까만 자전거를 타고 휘익 지나갑니다. 산꼭대기 고추밭에 비닐을 씌우고 내려가는 건, 아까 학교에서 만난 창용이입니다. 부지런히 뒤를 쫓아 내려오니, 녀석은 그새 아버지와 함께 상추모종을 심고 있습니다. 괭이로 구멍을 파는 창용이와 상추를 심는 아버지의 호흡이 척척 들어맞습니다.

“아버지 잘못 만나 고생이지, 뭐.” 아버지 박재환 씨(49세)의 말을 창용이가 받습니다. “초등학교만 들어가면 이 정도는 다 하는데요, 뭐.” 어른들 몰래 어른이 돼버린 이 산골소년의 흙 묻은 장화를 언제 한 번 몰래 씻어주고 싶습니다.

이제 ‘종점’으로 갈 차례입니다. 북동마을 안에서도 가장 오지인 함바위골. 비포장 도로로 6km 길을 달려야 닿을 수 있는 함바위골에는 최재규 할아버지(66세)와 안숙자 할머니(65세)네 단 한 집만 살고 있습니다. 하나둘 사람들이 마을을 등져도 일궈야 할 밭 때문에 도저히 떠날 수 없었다는 두 분의 오후를 지금부터 훔칠 요량입니다.

못내 아쉽습니다. 할아버지의 ‘파대’ 치는 소리를 들려주지 못 하는 것이 말입니다. 파대는 새나 동물을 쫓을 때 쓰는 끈입니다. 서너 번 휘휘 돌렸다가 적당한 순간에 내리치는데, 그 소리가 총 쏘는 소리를 방불케 합니다. 끈의 꼬리 부분을 이용해서 내는 이 소리는 할아버지 말마따나 아무나 낼 수 있는 소리가 아닌 듯합니다.

아쉬운 건 또 있습니다. 해 지기 전, 뒷산으로 풀을 먹으러 간 소를 몰고 느릿느릿 집으로 돌아오는 할머니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 하는 것 말입니다. 적당한 시간이 되면 알아서 집 쪽으로 내려오는 소와, 그런 소가 대견해서 어쩔 줄 모르는 할머니의 참 고운 ‘초저녁 데이트’를 꿈결인 양 바라봅니다.

당연히, 솔밭을 놀이터로 갖고있는 녀석들이 부럽습니다. 하지만 진짜 부러운 건 솔밭보다 죽은 나무며 버려진 돌멩이까지 놀잇감으로 이용할 줄 아는 지혜임을, 녀석들은 아직 모릅니다.

열무김치와 미나리무침, 돈을 주고 산 것이라곤 하나도 없는 소박한 밥상까지 받고 난 뒤, 그만 자리를 뜹니다. 가슴속에 그리움이 물처럼 고인 두 분이, 차의 꽁무니가 더 이상 보이지 않을 때까지 오래도록 손을 흔듭니다.
다시 이곳에 온다면, 그땐 그 어떤 것으로의 변신도 꿈꾸지 않겠습니다. 마을사람들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변신하지 않아도, 그게 누구든, 그들에겐 그저 반가움이라는 걸 이제 알기 때문입니다.

글 박미경 사진 이규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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