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오늘 참 좋은 칼럼들이 있어서 옮겨봅니다. 정옥임박사는 여성으로서 참
대단하신분이라 생각합니다. 똑똑하고 자신있는 모습이 좋더군요. 이분 얘기를 들어보려 요번주 세미나에 한번 가볼까
생각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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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軍을 흔들지 말라
[문화일보 2006-02-20 14:41]
‘국방개혁 2020’과 관련, 세간에는 몇 가지 오해가 있다. 개혁을 통해 군인 수(특히 지상군)가 대폭 줄어들면 그만큼 재정 부담도 줄 것이라는 기대가 그 가운데 하나다. 이러한 인식의 배후에는 세계적 추세인 병력감축의 필요성에 더하여, 군에 대한 근본적 불신이 깔려 있다. ‘남북간 화해와 경협이 가시화되고 민족공조가 강화되는 마당에 징병제로 수많은 젊은이를 동원하는’ 문제와 함께 지난날 군이 정치 전면에서 챙긴 기득권을 회수해야 한다는 논리도 개진된다.
한마디로 군은 개혁 대상이다. 국방비의 상당액을 줄여 사회복지 예산으로 대체하자는 주장도 있다. 그런데 개혁에 공짜는 없다.
병력수를 줄이는 대신 그들을 질적으로 정예화하고 첨단병력을 강화하려면 더 많은 돈이 필요하다. 보병사단의 1년 운영비가 622억원이라면, F15K 전투기 가격은 1000억원이다. 7000t급 구축 함은 1조460억원이라고 한다.
사실 지금까지 일어난 불미스러운 사건들의 책임은 전적으로 군에 있다. 멀리 논산훈련소 인분 사건이나 전방관측소(GOP) 총기난사 사건을 들먹일 것도 없이, 최근 일어난 민간인의 탄약고 침투 사건은 군 스스로를 희화화하는 소재마저 제공했다.
그런데 이러한 군 대상 범죄에는 몇 가지 주목할 공통점이 나타난다. 예비역 출신인 범인들이 실탄을 사용하지 못하는 초병의 허점을 노려 군 무기창을 탈취하려 했다는 것이다. 민주화의 진척과 함께 군내의 총기사고가 ‘언론’에 모두 노출되자 비난을 우려한 정부가 최전방을 제외한 부대 초병의 실탄을 공포탄으로 대체했는데, 이 때문에 민간인의 군 대상 범죄는 늘고 있는 것이다 .
작심하고 들어온 영내 침입자에 대해 사고방지와 인권보호를 이유로 공포탄만 사용하고 망신만 당하는 군이 과연 국민의 군대 인가.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사병 의료 복지, 동성애자에 대한 병영내 인권 문제 등 해결해야 할 쟁점이 산적하다. 군 자체가 쇄신을 통해 과거의 관성을 버리고 거듭나야 함은 분명하다.
그런데 여기서 가장 근본적인 문제가 대두된다. ‘국방’이란 무엇인가. 며칠 전 학생들과 함께 최전방 체험을 했다. 영하 20도 를 밑도는 혹한 속에서도 고지를 지키고 있는 젊은 병사들을 직접 만났다. 학생들은, 한반도기를 흔들며 남북한 선수들이 동계 올림픽에 동시 입장했다고 하여 군사적 긴장이 해결된 것은 아님을 체감했을 것이다.
강대국들은 말할 것도 없고, 전혀 걱정거리가 없을 듯한 싱가포르나 스웨덴도 군비를 강화하고 첨단 무기를 도입하는 것이 21세기의 국제정치다. 손자는, 평화가 힘으로부터 나온다고 역설했다 . 군대는 전쟁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전쟁을 막기 위해 존재한다. 이는 역사의 공리이다. 주변 4강으로 둘러싸인 한반도의 지정학적 현실이, 시간이 흐른다고 달라지지도 않는다.
군 복무가 낭비이며 군은 곧 개혁 대상이라는 사회 일각의 분위기는 국민, 특히 젊은 세대를 혼돈스럽게 하고, 군 종사자의 자긍심도 위축시킨다. 더욱이 군은 과거 정치화의 원죄와 함께 인 사상의 불이익에 대한 우려 때문에, 진정한 개혁과 미래 군비 강화를 위해 무엇이 절실한지에 대한 의견을 내놓는 일도 꺼린다.
군이 미래 지향적으로 달라져야 함은 이론(異論)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그것은 국가안보를 위해 더욱 유능한 군으로 자리매김하는 산고여야 한다.
군이 정치화해서도 안되듯이 정치의 대상이나 여론의 조롱거리로 전락해서도 안된다. 군(軍)은 군(軍)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존재 이유는 ‘국방’에 있다. ‘국방개혁 2020’의 궁극 목표는 군의 폄훼가 아닌, 군의 강화에 있다. 그리고 ‘국방’은 국민의 생존과 번영을 위해 존재한다. 이제는 군이 ‘외부의 위협’을 지키는 국방에 전념하도록, 그들의 투철한 국가관과 소명의식을 독려할 때다.
[[정옥임 / 선문대 교수·국제정치학]]
[김주영 칼럼]군을 흔들지 말라
[세계일보 2006-02-19 21:03]
며칠 전 군복무 시절 한솥밥을 먹었던 친구를 찾아가 그의 사무실 근처 식당에서 점심을 같이했다. 일 년에 한두 번은 그의 사무실 근처를 지나가다 말고 문득 그가 떠오르면 스스럼없이 찾곤 한다.
만나 봐야 고초와 질곡을 같이했던 군 시절 얘기로 어린애들처럼 낄낄 웃기나 하고 차 한잔 마시고 작별하는 것이 고작이다. 그런데도 그를 만나는 것은 즐겁고 보람된 일로만 기억된다. 일선의 전방부대에서 연탄난로를 껴안고 마주앉아 할 말 못할 말 가릴 것 없이 거리낌 없이 나누고, 한솥밥을 퍼서 눈 힐끔거리며 게걸스럽게 먹고, 좁은 침상에서 서로 부대끼며 잠자고, 얼음장을 깨어 마른 목을 축이던 젊은 시절의 추억이 이토록 오래도록 끈끈한 정으로 남게 되리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했다.
그것이 심각한, 어쩌면 치명적이기도 한 정서적 결핍 상태를 겪고 있는 이 황폐화된 세상에선 너무나 소중한 것이란 생각을 했었기에 필자는 기회 있을 때마다 군대란 자원해서라도 갔다와야 한다고 강변해 왔었다.
그런 군대가 요즘에 이르러 전통적인 정체성이 침해되거나 훼손되는 일들로 곤욕을 치르고 있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휴전 상태에 있는 우리나라 군대뿐만 아니라, 국경선이나 치안 상의 긴장감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 어느 나라 군대라 할지라도 변해서는 안 될 불변의 가치가 있다. 그것은 전쟁이 일어났을 때, 반드시 승리해야 한다는 결연한 각오다.
뿐만 아니라 전쟁을 겪고 있지 않은 경우라 하더라도 나라에 대한 충성심 한가진 절대로 변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목숨이 다할 때까지 나라와 군대의 명예를 지켜 나가는 일일 것이다. 이 세 가지가 조금이라도 의심받게 되거나 손상을 입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면, 군대는 곧장 그 목숨까지도 초개와 같이 버릴 각오를 다진다.
그런데 이런 군의 정체성들이 군대 내부의 어긋남 때문이 아니라 정치적 당리당략에 의해, 혹은 개인의 정치적 명분 세우기나 이해득실에 따라 방해되거나 교란되는 모습들이 나타나고 있어 염려스러운 것이다. 결코 발설해서는 안 될 군사기밀을 공개한 것은 그 이유가 어디에 있든 이해하기 어려운 처사다. 참으로 국방 하기 어려운 나라가 되었다는 개탄을 쏟아냄 직하다.
한쪽에선 군이 가지는 본연의 임무 이외에 당의 이념에 걸맞은 행동과 정신무장을 요구하는가 하면, 이것이 무리한 요구라는 것조차 안중에 없는 듯하다. 한쪽에선 군대가 내는 목소리가 너무 크다고 핀잔하고, 다른 한쪽에선 군대의 목소리는 클수록 좋다고 부추겨서 도대체 군대가 어떤 목소리를 가져야 하고, 어떤 이념적 패러다임을 가져야 하는 것인지 쓰디쓴 입맛을 다셔야 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닌 것이다.
어디 그뿐인가. 군대에 대한 사회 일반의 인식들이 뒤틀린 고정관념의 틀에 갇혀 전혀 개선의 기미를 보이지 않는 측면에도 염려스러움이 있다.
과거 70년대나 80년대에 이르기까지 군대 생활을 했던 사람들에게 군에 대한 좋지 않은 기억이 고정관념으로 깔려 있다. 그들은 자신 혹은 그 세대가 겪었던 군 생활의 경험만을 통해 군대를 인식하고 있다. 그래서 신문에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군과 관련된 기사가 나면 그들이 가진 고정관념의 틀에서 분석하려 든다.
어째서 군대를 군대 자신이 가져야 하는 본연의 임무에 충실하지 못하게 자신의 정치적 이해 득실에 따라, 혹은 고정관념의 틀로 이리 휘두르고 저리 휘두르고 있는가. 지금은 군대가 본연의 임무에만 충실하도록 도와 주고, 또한 개혁과 변화를 추구하려는 노력을 조용히 지켜봐야 할 때다.
소설가
* 고성달(견적필살)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6-02-21 1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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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軍을 흔들지 말라
[문화일보 2006-02-20 14:41]
‘국방개혁 2020’과 관련, 세간에는 몇 가지 오해가 있다. 개혁을 통해 군인 수(특히 지상군)가 대폭 줄어들면 그만큼 재정 부담도 줄 것이라는 기대가 그 가운데 하나다. 이러한 인식의 배후에는 세계적 추세인 병력감축의 필요성에 더하여, 군에 대한 근본적 불신이 깔려 있다. ‘남북간 화해와 경협이 가시화되고 민족공조가 강화되는 마당에 징병제로 수많은 젊은이를 동원하는’ 문제와 함께 지난날 군이 정치 전면에서 챙긴 기득권을 회수해야 한다는 논리도 개진된다.
한마디로 군은 개혁 대상이다. 국방비의 상당액을 줄여 사회복지 예산으로 대체하자는 주장도 있다. 그런데 개혁에 공짜는 없다.
병력수를 줄이는 대신 그들을 질적으로 정예화하고 첨단병력을 강화하려면 더 많은 돈이 필요하다. 보병사단의 1년 운영비가 622억원이라면, F15K 전투기 가격은 1000억원이다. 7000t급 구축 함은 1조460억원이라고 한다.
사실 지금까지 일어난 불미스러운 사건들의 책임은 전적으로 군에 있다. 멀리 논산훈련소 인분 사건이나 전방관측소(GOP) 총기난사 사건을 들먹일 것도 없이, 최근 일어난 민간인의 탄약고 침투 사건은 군 스스로를 희화화하는 소재마저 제공했다.
그런데 이러한 군 대상 범죄에는 몇 가지 주목할 공통점이 나타난다. 예비역 출신인 범인들이 실탄을 사용하지 못하는 초병의 허점을 노려 군 무기창을 탈취하려 했다는 것이다. 민주화의 진척과 함께 군내의 총기사고가 ‘언론’에 모두 노출되자 비난을 우려한 정부가 최전방을 제외한 부대 초병의 실탄을 공포탄으로 대체했는데, 이 때문에 민간인의 군 대상 범죄는 늘고 있는 것이다 .
작심하고 들어온 영내 침입자에 대해 사고방지와 인권보호를 이유로 공포탄만 사용하고 망신만 당하는 군이 과연 국민의 군대 인가.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사병 의료 복지, 동성애자에 대한 병영내 인권 문제 등 해결해야 할 쟁점이 산적하다. 군 자체가 쇄신을 통해 과거의 관성을 버리고 거듭나야 함은 분명하다.
그런데 여기서 가장 근본적인 문제가 대두된다. ‘국방’이란 무엇인가. 며칠 전 학생들과 함께 최전방 체험을 했다. 영하 20도 를 밑도는 혹한 속에서도 고지를 지키고 있는 젊은 병사들을 직접 만났다. 학생들은, 한반도기를 흔들며 남북한 선수들이 동계 올림픽에 동시 입장했다고 하여 군사적 긴장이 해결된 것은 아님을 체감했을 것이다.
강대국들은 말할 것도 없고, 전혀 걱정거리가 없을 듯한 싱가포르나 스웨덴도 군비를 강화하고 첨단 무기를 도입하는 것이 21세기의 국제정치다. 손자는, 평화가 힘으로부터 나온다고 역설했다 . 군대는 전쟁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전쟁을 막기 위해 존재한다. 이는 역사의 공리이다. 주변 4강으로 둘러싸인 한반도의 지정학적 현실이, 시간이 흐른다고 달라지지도 않는다.
군 복무가 낭비이며 군은 곧 개혁 대상이라는 사회 일각의 분위기는 국민, 특히 젊은 세대를 혼돈스럽게 하고, 군 종사자의 자긍심도 위축시킨다. 더욱이 군은 과거 정치화의 원죄와 함께 인 사상의 불이익에 대한 우려 때문에, 진정한 개혁과 미래 군비 강화를 위해 무엇이 절실한지에 대한 의견을 내놓는 일도 꺼린다.
군이 미래 지향적으로 달라져야 함은 이론(異論)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그것은 국가안보를 위해 더욱 유능한 군으로 자리매김하는 산고여야 한다.
군이 정치화해서도 안되듯이 정치의 대상이나 여론의 조롱거리로 전락해서도 안된다. 군(軍)은 군(軍)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존재 이유는 ‘국방’에 있다. ‘국방개혁 2020’의 궁극 목표는 군의 폄훼가 아닌, 군의 강화에 있다. 그리고 ‘국방’은 국민의 생존과 번영을 위해 존재한다. 이제는 군이 ‘외부의 위협’을 지키는 국방에 전념하도록, 그들의 투철한 국가관과 소명의식을 독려할 때다.
[[정옥임 / 선문대 교수·국제정치학]]
[김주영 칼럼]군을 흔들지 말라
[세계일보 2006-02-19 21:03]
며칠 전 군복무 시절 한솥밥을 먹었던 친구를 찾아가 그의 사무실 근처 식당에서 점심을 같이했다. 일 년에 한두 번은 그의 사무실 근처를 지나가다 말고 문득 그가 떠오르면 스스럼없이 찾곤 한다.
만나 봐야 고초와 질곡을 같이했던 군 시절 얘기로 어린애들처럼 낄낄 웃기나 하고 차 한잔 마시고 작별하는 것이 고작이다. 그런데도 그를 만나는 것은 즐겁고 보람된 일로만 기억된다. 일선의 전방부대에서 연탄난로를 껴안고 마주앉아 할 말 못할 말 가릴 것 없이 거리낌 없이 나누고, 한솥밥을 퍼서 눈 힐끔거리며 게걸스럽게 먹고, 좁은 침상에서 서로 부대끼며 잠자고, 얼음장을 깨어 마른 목을 축이던 젊은 시절의 추억이 이토록 오래도록 끈끈한 정으로 남게 되리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했다.
그것이 심각한, 어쩌면 치명적이기도 한 정서적 결핍 상태를 겪고 있는 이 황폐화된 세상에선 너무나 소중한 것이란 생각을 했었기에 필자는 기회 있을 때마다 군대란 자원해서라도 갔다와야 한다고 강변해 왔었다.
그런 군대가 요즘에 이르러 전통적인 정체성이 침해되거나 훼손되는 일들로 곤욕을 치르고 있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휴전 상태에 있는 우리나라 군대뿐만 아니라, 국경선이나 치안 상의 긴장감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 어느 나라 군대라 할지라도 변해서는 안 될 불변의 가치가 있다. 그것은 전쟁이 일어났을 때, 반드시 승리해야 한다는 결연한 각오다.
뿐만 아니라 전쟁을 겪고 있지 않은 경우라 하더라도 나라에 대한 충성심 한가진 절대로 변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목숨이 다할 때까지 나라와 군대의 명예를 지켜 나가는 일일 것이다. 이 세 가지가 조금이라도 의심받게 되거나 손상을 입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면, 군대는 곧장 그 목숨까지도 초개와 같이 버릴 각오를 다진다.
그런데 이런 군의 정체성들이 군대 내부의 어긋남 때문이 아니라 정치적 당리당략에 의해, 혹은 개인의 정치적 명분 세우기나 이해득실에 따라 방해되거나 교란되는 모습들이 나타나고 있어 염려스러운 것이다. 결코 발설해서는 안 될 군사기밀을 공개한 것은 그 이유가 어디에 있든 이해하기 어려운 처사다. 참으로 국방 하기 어려운 나라가 되었다는 개탄을 쏟아냄 직하다.
한쪽에선 군이 가지는 본연의 임무 이외에 당의 이념에 걸맞은 행동과 정신무장을 요구하는가 하면, 이것이 무리한 요구라는 것조차 안중에 없는 듯하다. 한쪽에선 군대가 내는 목소리가 너무 크다고 핀잔하고, 다른 한쪽에선 군대의 목소리는 클수록 좋다고 부추겨서 도대체 군대가 어떤 목소리를 가져야 하고, 어떤 이념적 패러다임을 가져야 하는 것인지 쓰디쓴 입맛을 다셔야 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닌 것이다.
어디 그뿐인가. 군대에 대한 사회 일반의 인식들이 뒤틀린 고정관념의 틀에 갇혀 전혀 개선의 기미를 보이지 않는 측면에도 염려스러움이 있다.
과거 70년대나 80년대에 이르기까지 군대 생활을 했던 사람들에게 군에 대한 좋지 않은 기억이 고정관념으로 깔려 있다. 그들은 자신 혹은 그 세대가 겪었던 군 생활의 경험만을 통해 군대를 인식하고 있다. 그래서 신문에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군과 관련된 기사가 나면 그들이 가진 고정관념의 틀에서 분석하려 든다.
어째서 군대를 군대 자신이 가져야 하는 본연의 임무에 충실하지 못하게 자신의 정치적 이해 득실에 따라, 혹은 고정관념의 틀로 이리 휘두르고 저리 휘두르고 있는가. 지금은 군대가 본연의 임무에만 충실하도록 도와 주고, 또한 개혁과 변화를 추구하려는 노력을 조용히 지켜봐야 할 때다.
소설가
* 고성달(견적필살)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6-02-21 1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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