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랍시고

[스크랩] 오규원시인의 시

지리산자연인 2007. 2. 6. 11:49

한 잎의 여자

오규원

 

 

 

나는 한 여자를 사랑했네. 물푸레나무 한 잎같이 쬐그만 여자, 그 한 잎의 여자를 사랑했네.

물푸레나무 그 한 잎의 솜털, 그 한 잎의 맑음, 그 한 잎의 영혼, 그 한 잎의 눈, 그리고 바람이

불면 보일듯 보일듯한 그 한 잎의 순결과 자유를 사랑했네.

정말로 나는 한 여자를 사랑했네. 여자만을 가진 여자, 여자 아닌
것은 아무것도 안가진 여자,

여자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 여자, 슬픔같은 여자, 병신같은 여자, 시집같은 여자, 그러나 누구나

영원히 가질 수 없는 여자, 그래서 불행한 여자.

그러나 영원히 나 혼자 가지는 여자, 물푸레나무 그림자같은 여자. 


     

오규원




저기 저 담벽, 저기 저 라일락, 저기 저 별, 그리고 저기 저 우리 집 개똥 하나, 그래 모두 이리와
내 언어 속에 서라. 담벽은 내 언어의 담벽이 되고, 라일락은 내 언어의 꽃이 되고, 별은 반짝이고,
개똥은 내 언어의 뜰에서 굴러라. 내가 내 언어에게 자유를 주었으니 너희들도 자유롭게 서고,
앉고, 반짝이고, 굴러라. 그래 봄이다.

봄은 자유롭다. 자 봐라, 꽃 피고 싶은 놈 꽃 피고, 잎 달고 반짝이고 싶은 놈은 반짝이고,
아지랑이고 싶은 놈은 아지랑이가 되었다. 봄이 자유가 아니라면 꽃 피는 지옥이라고 하자.
그래 봄은 지옥이다. 이름이 지옥이라고 해서 필 꽃이 안 피고, 반짝일 게 안 반짝이든가.
내 말이 옳으면 자, 자유다 마음대로 뛰어라.

 

 

원피스
오규원


여자가 간다 비유는 낡아도
낡을 수 없는 生처럼 원피스를 입고
여자가 간다 옷 사이로 간다
밑에도 입고 TV 광고에 나오는
논노가 간다 가고 난 자리는
한 物物이 지워지고 혼자 남은
땅이 온몸으로 부푼다 뱅뱅이
간다 뿅뿅이 간다 동그랗게 부풀어
오르는 땅을 제자리로 내리며
길표양말이 간다 아랫도리가
아랫도리와 같이 간다
윗도리가 흔들 간다 차가 식식대며
간다 빈혈성 오후가 말갛게 깔리고
여자가 간다 그 사이를 헤집고 원피스를 입고
낡은 비유처럼

 

 

안개

오규원


강의 물을 따라가며 안개가 일었다
안개를 따라가며 강이 사라졌다 강의
물 밖으로 오래 전에 나온
돌들까지 안개를 따라 사라졌다
돌밭을 지나 초지를 지나 둑에까지
올라온 안개가 망초를 지우더니
곧 나의 하체를 지웠다
하체 없는 나의 상체가
허공에 떠 있었다
나는 이미 나의 지워진 두 손으로
지워진 하체를 툭 툭 쳤다
지상에서 보이지 않는 존재가
강변에서 툭 툭 소리를 냈다

 

 

이별 
오규원 
어디에나 너는 있다. 
산 여울 맑은 물에 어리는 
서늘한 너의 눈매, 
눈은 젖어 있구나. 
솔 숲 바람에 어리는 
청아한 너의 음성, 
너는 속삭이고 있구나. 
더 이상 연연해하지 않기로 했다. 
이별이란 흐르는 강물인 것을, 
이별이란 흐르는 바람인 것을, 
더 이상 돌아보지 않기로 했다. 
싸락눈 흩뿌리는 겨울 산방에 
서러운 듯 피어오른 난 한 송이, 
시방 너는 내 앞에서 울고 있구나. 

쑥부쟁이 
오규원 
길 위로 옆집 여자가 소리 지르며 갔다 
여자 뒤를 그 집 개가 짖으며 따라갔다 
잠시 후 옆집 사내가 슬리퍼를 끌며 뛰어갔다 
옆집 아이가 따라갔다 가다가 길 옆 
쑥부쟁이를 발로 툭 차 꺾어놓고 갔다 
그리고 길 위로 사람 없는 오후가 왔다 
 
 
물증(物證)
오규원   
아프리카 탕가니카 호(湖)에 산다는
폐어(肺魚)는 학명이 프로톱테루스 에티오피쿠스 
그들은 폐를 몸에 지니고도 
3억만 년 동안 양서류로 진화하지 않고 
살고 있다 네 발 대신 
가느다란 지느러미를 질질 끌며 
물에 있으면 아가미로 숨쉬고 
물이 마르면 폐로 숨을 쉬며 
고생대(古生代) 말기부터 오늘까지 살아 
어느 날 우리 나라의 수족관에 
그 모습을 불쑥 드러냈다 
뻘 속에서 4년쯤 너끈히 살아 견딘다는 
프로톱테루스 에티오피쿠스여 뻘 속에서 
수십 년 견디는 우리는 
그렇다면 30억만 년쯤 진화하지 않겠구나 
깨끗하게 썩지도 못하겠구나 


 
지는 해
오규원

 

그때 나는 강변의 간이주점 근처에 있었다
해가 지고 있었다
주점 근처에는 사람들이 서서 각각 있었다
한 사내의 머리로 해가 지고 있었다
두 손으로 가방을 움켜쥔 여학생이 지는 해를 보고 있었다
젊은 남녀 한 쌍이 지는 해를 보고 있었다
주점의 뒷문으로도 지는 해가 보였다
한 사내가 지는 해를 보다가 무엇이라고 중얼거렸다
가방을 고쳐쥐며 여학생이 몸을 한 번 비틀었다
젊은 남녀가 잠깐 서로 쳐다보며 아득하게 웃었다
나는 옷 밖으로 쑥 나와 있는 내 목덜미를 만졌다
한 사내가 좌측에서 주춤주춤 시야 밖으로 나갔다
해가 지고 있었다

 
순례 序 
오규원
1 


들은 길을 모두 구부린다
도식주의자가 못 되는 이 들이
몸을 풀어
나도 길처럼 구부러진다


2


종일
바람에 귀를 갈고 있는 풀잎
길은 늘 두려운 이마를 열고
나를 멈춘 자리에 다시
웅크린 이슬로 여물게 한다


모든 길은 막막하고 어지럽다 그러나
고개를 넘으면
전신이 우는 들이 보이고
지워진 길을 인도하는 풀이 보이고
들이 기르는 한 사내의
편애와 죽음을 지나


먼길의 귀 속으로 한 발자국씩
떨며 들어가는
영원히 집이 없을 사람들이 보인다
바람이 분다 살아봐야겠다


3


바람이 분다, 살아봐야겠다
숲이 깊을수록 길을 지워버리는 들에서
무언인가 저기 저 길을 몰고 오는
바람은
저기 저 길을 몰고 오는 바람 속에서
호올로 나부끼는
몸이 작은 새의 긴 그림자는
무엇인가 나에게 다가와 나를 껴안고
나를 오오래 어두운 그림자로 길가에 세워두고
길을 구부리고 지우고
그리고 무엇인가 멈추면서 나아가면서
저 무엇인가를 사랑하면서
나를 여기에서 떨게 하는 것은
 

중진시인 오규원씨 별세[연합뉴스 2007-02-02 17:43]  

 

(서울=연합뉴스) 김정선 기자 = '날(生) 이미지의 시'를 추구해온 중진시인 오규원 전 서울예대 문예창작과 교수가 2일 오후 5시10분 신촌세브란스 병원에서 지병으로 별세했다. 향년 66세.

폐기종으로 강원도 영월, 경기도 양평 등지에서 요양생활을 했던 고인은 최근 병세가 갑자기 악화돼 입원했다.

1941년 경남 삼랑진에서 태어난 시인은 부산사범학교를 거쳐 동아대 법학과를 졸업했으며 1965년 '현대문학'에 '겨울 나그네'가 처음으로 추천돼 1968년 '몇 개의 현상'이 추천 완료돼 등단했다.

문장사 대표를 지냈던 고인은 '분명한 사건'(1971)부터 '새와 나무와 새똥 그리고 돌멩이'(2005)에 이르기까지 시집 10여 권을 출간했다.

고인은 1990년대 초반부터 사소한 사물들의 이미지를 있는 그대로 드러낸 '날(生) 이미지의 시'의 개념을 강조해왔다.

사물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날 이미지의 시'는 시의 수사법으로서 은유를 거부하고 왜곡 없이 세계와 닿는 시각적 이미지와 세계에 대한 시인의 직관적 인식을 언어로 옮긴 것이다.

20여 년 간 서울예대 문예창작과 교수로 재직한 고인은 세심한 배려로 요즘 활발하게 활동하는 수많은 문인들을 길러낸 것으로도 유명하다.

신경숙 함민복 하성란 천운영 강영숙 박형준 백민석 장석남 윤성희 마르시아스 심 등 문인 46명이 그와의 추억과 인연을 회고한 '문학을 꿈꾸는 시절'(2002)을 회갑기념문집으로 내기도 했다.

고인은 시집 현대문학상, 이산문학상 등을 받았으며 대한민국 문화예술상 문학 부문(2003) 수상자로도 선정됐다.

유족으로는 방송작가인 부인 김옥영 씨와 2남 1녀가 있다. 발인은 4일 오전. 빈소는 강남 삼성의료원.

jsk@yna.co.kr

 

 

“가끔은 주목받는 생이고 싶다던” 오규원시인 별세

출처 : 국내 오지촌을 찾아서
글쓴이 : 십이월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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