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랍시고

[스크랩] 침묵~ 바닷가에서 주운 칼날

지리산자연인 2007. 9. 3. 15:09

침묵, 바닷가에서 주운 칼날 - 김정란 


나는 이제 망설이지 않는다
때가 되었다는 것을 알아차렸으므로
나는 내면의 신전에 내려갔었다
신탁은 분명했다 그것은 쓰여진 글자였다, 이번엔

당당하라, 너를 죽여라, 그리고 너 자신이 되어라

나는 거대한 침묵에 휩싸여 무섭게 조용해진다

어제 새벽에 내가 찾아갔던 푸르고 검은 바다,
바닷속 어느 숨겨진 지역에서 낮게 빛나는
적의에 가득찬 빛의 아름다움에 놀라서
나는 맨발로 모랫벌을 오랬동안 헤매어다녔다


무엇인가가 내 발을 찔렀고, 나는 그것이
녹슨 칼날 들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것들을 주워 가슴에 품고 집에 돌아왔다

어제 오후 무렵부터 명치 끝이 뻐근히 아파왔다
나는 알고 있었다 칼들이 가슴 속으로 천천히
그러나 명확하게 파고 들어가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내 가슴 어느 오래된 지역에선가
녹이 씻겨나가고 새파란 제 색깔을 회복하고 있다는 것을
오늘 밤, 보름달이 뜨고,
그것들 달빛 아래에서 신성한 푸른 빛으로 날카롭게 벼려진다

나는 더이상 흔들리지 않는다
흔들림으로 흔들림을 다시리는 방식을 익혔으므로
나는 흔들리는 연약한 내 안에서 단단하다

나는 사물들의 뿌리에 나의 쇠붙이를
가만히 가져다 놓는다

그리곤 낮게 배를 깔고 바라본다
그것들 체계의 사이와 사이를 조용조용
그러나 날렵하고 가볍게 헤집고 다니는 것을
그리고 제3의 형식을 만들어 내는 것을

꿈꾸는 자들은 다른 방식으로 진화한다  

 

출처 : 고향다락방
글쓴이 : 선매숭자 원글보기
메모 :

'시랍시고' 카테고리의 다른 글

모슬포에서../김영남  (0) 2007.12.04
[스크랩] 격정  (0) 2007.11.22
[스크랩] 벌통 나르는 밤  (0) 2007.06.15
[스크랩] 지리산에서  (0) 2007.05.08
[스크랩] 오규원시인의 시  (0) 2007.02.06